간밤에 봄비가 참 곱게도 왔습니다. TV의 일기 예보로는 곳곳에서 천둥 번개와 돌풍을 데리고 온다고 했지만 그 곳곳이 여기는 아닌 듯 조용하기만 했습니다. 저녁뉴스를 채 다 보지도 못하고 졸음이 오길래 조금 더 TV를 보아야 하는(!) 아내를 놔둔 채 저는 정지 방에 가 누웠습니다. 뜨거운 것 좋아하는 안식구 때문에 안방은 불을 많이 때서 저는 참 땀이 많이 납니다만 정지 방은 요즈음은 불 때는 시늉만 하는지라 아주 알맞게 따뜻합니다.

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자 이내 후드득거리는 빗소리가 들렸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잠자리에 누웠을 때 창밖의 빗소리처럼 좋은 자장가가 또 있을까요. 멎었단 또 오고 가늘어졌다간 다시 굵어지면서 화단에, 화단의 튤립꽃잎위에, 연못에, 연못의 개구리 눈썹위에, 대숲에 장독에 지붕에 마당에 내리는 소리들이 합쳐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지라 온 마음이 편하게 녹아나서 꿈 없는 잠 속으로 저절로 빠져들었습니다.

비는 아침 먹고 나서도 한참을 더 온 후에 서서히 그칩니다. 바람 한 점 없이 이슬비 색시비로 오는 터라 토방 한쪽 마루 끝 하나 젖지 않고 고실해서 정지 아궁이에 불 때는 연기조차 향기롭군요. 가늘어진 비는 그친 줄 모르게 그치고 그것은 모두 산으로 몰려갔는지 중턱은 안개가 끼어 뽀얗습니다. 하루 이틀사이 산 벗이 활짝 피고 연초록과 분홍색색가지 나뭇잎이 언뜻언뜻 하늘 한쪽을 열어젖히며 비추는 밝은 해 기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기까지 합니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제 아무리 훌륭하단 들 이 진경의 진경에 대일 수 있을까요? 마루 끝에 멍하니 앉아서 그저 하염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일 년 열두 달이 이렇듯 모두 사월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겨울이 있어야 봄이 있는 것이지만 사월은 삼월이나 오월과는 또 달라서 산과 들과 바다에 온 갖가지 나물들이 돋고 그걸 먹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저는 사월이 되면 밭에서 일하는 것은 한껏 게으름을 부리면서도 산으로 바다로 쏘다니며 때론 어슬렁거리며 나물하기를 즐깁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의 사월 달 일이란 건 가장 큰 게 고추심고 못자리 설치하는 것일 텐데요. 저는 힘들기만 하고 병 때문에 몇 번이나 수확에 실패한 고추농사를 하려하지 않으니 남들보다 조금 더 한가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몸이 편한 대신 부실목이 커야 고름도 많더란 식으로 제 농사는 먹잘 것이 없습니다. 먹잘 것이 없어서 산과 바다로 나다니는지 산과 바다로만 다니며 나물들 조개들을 캐고 싶어서 고된 일을 만들지 않는지 딱히 저도 나누기가 어렵습니다만 어쨌거나 다시 나물이야긴데요, 요즈음은 정말이지 산나물 바다나물의 홍수 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삼월 말쯤부터 머위 나물을 시작으로 원추리가 나오고 고사리 취가 나오고 다래덩굴 으름덩굴 순이 나오고 두릅이 나오더니 질세라 엄나무 순도 막 나오기 시작해서 행복합니다.

어제는 바다에 갔습니다. 물이 많이 빠지지 않는 조금에 가까운 열두물이긴 해도 달력에 표시된 물때표를 보니 지충이나 파래 따위는 뜯을 만하겠더군요. 이것들은 게나 조개와는 달리 바위에 달라붙어 있는 것인데 또 이때가 지나면 쇠어서 먹을 수가 없어요. 파래는 뜯어다가 깨끗이 씻어서 맛있는 액젓에 장아찌를 담가 놓으면 한여름 반찬으로는 아주 그만인데 누가 잘 눈여겨보지도 않아서 늘 저만 뜯는 것 같더군요. 파래 뜯고 지충이도 조금 뜯어 왔습니다. 거무튀튀하고 꺼슬꺼슬 기다란 해서 바위에 붙은 무슨 벌레 같은 게 지충이인데  뜨거운 물에 살짝 대치면 아주 새파랗게 변하고 이걸 된장 풀어서 자작하게 덖으며 파 마늘 통깨 넣으면 처음 생긴 모양하고는 180도 다른 최고의 바다나물이 됩니다.

바다에 나가고 산에 오르면 기분도 좋고 이렇게 밥상이 풍성합니다. 제 안식구는 이중에서 오직 하나, 고사리 꺾기를 좋아합니다. 오늘처럼 비가 온 뒤에는 밭에서건 화단에서건 땅이 질어서 할일이 없으니 고사리 밭을 찾아서 집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겁니다. 고사리 밭에 가서 작년에 말라죽은 고사리 덤불과 가시들(특히 찔레가시 있는 곳이 고사리도 많지요) 사이에 통통하게 올라오는, 그러나 그 색깔이 주변 색과 비슷해서 코앞에 두고도 놓치기 십상인 고사리를 하나씩 발견하고 꺾는 재미를 아내는 참 즐깁니다.

그런 이 사람을 위해서 고사리 밭을 하나 만드는 중입니다. 묵은 밭이 하나 있는데 늘 풀을 깎기 귀찮던 중 한곳에 고사리 포자가 날라 왔는지 고사리가 몇 대궁 올라 왔습니다. 그게 일년지나 이년지나 하니까 제법 평수가 넓어지더군요. 그래서 작년부터는 마음먹고 몇 차례씩 주변의 풀을 베어내고 올봄에는 다른데서 고사리 뿌리를 캐다가 그 옆에 벌려 심었더니 심은 곳마다 고사리들이 올라와서 고사리 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저 고사리 밭에서 나중에 편안하게 끊는 게 재미있을까요? 없는 것을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기도 하다가 그걸 발견했을 때라야, 그리고 고사리를 끊으려고 손을 내밀었을 때 찔레 가시에 찔려도 보고 어마뜨거라! 꽃뱀 같은 것이 살 같이 달아나는 것을 몸서리치면서도 끊어봐야 재미있지 원 저게 무슨 재밌을라나요. 만들기는 만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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