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때 입니다. 날은 춥지도 덥지도 않지요. 천지사방에 울긋불긋 꽃이 피고 신록이 날마다 푸름을 더해가고 있으니 일 년 중에 아마도 나들이하기 가장 좋은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더군다나 오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해서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이 끼어 있습니다. 늙으나 젊으나 애가 있으나 없으나 남녀를 가리지 않고 방안에 있기 답답하게 생겼습니다. 이놈의 황사와 미세 먼지만 아니라면 오늘 같은 주말엔 소풍 나온 사람들의 옷차림이 꽃보다도 더 알록달록 하겠지요.

우리 집 마누라님도 어제 경기도 가평까지 꽃구경을 다녀오셨답니다. 이곳 단위농협에는 농가주부모임이라는 조직이 있는데 해마다 한 번씩은 선진지 견학을 이유로 나들이를 하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봄에는 꽃구경이요. 가을엔 단풍구경이겠는데 평소에는 주로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까닭에 조합에서 그 수고를 위로하고자 관광차를 부르고 일정을 짜서 바람을 쏘이는 거지요. 꽃 좋아 하는 사람이 제 안식구만은 아니겠지만 이 사람은 지치지도 않고 10년 넘게 오로지 꽃 사랑이라 며칠 전부터 은근히 이날을 기다리는 것 같더군요.

여간해서 그러지 않는 사람인데 모이라는 시간에 맞춰야 된다며 첫새벽에 벌떡 일어나 제가 채근할 필요도 없이 차리고 나서는 것하며 저보다도 먼저 차에 올라타서 기다리는 것 하며 관광차 대기하고 있는 조합마당까지 대려다 줬더니 빠이빠이 손 흔들고 냉큼 차에 타는 꼴하며…· 구경 갔다 저녁에 돌아오면 또 데리러 오라고 큰소리 땅땅 치겠지요?

제가 왜 이렇게 조금 비아냥스럽게 이야기 하냐면요, 아 어제 점심에 밥을 먹으려고 반찬 상에 놔 가지고 방에 들어와서 밥통을 열어보니 밥이 글쎄 반에 반 그릇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험들 해 보셨으리라 짐작됩니다만 이런 때에 남자 분들 어떤 기분이 나던가요? 허탈하지 않던가요? 열심히 일하고 난 뒤라 배도 더 고프고, 욕지기보다는 짜증이 나지요. 저는 다행히 부엌 싱크대 속에 라면도 몇 봉지 사다 놓은 게 있고 그저께 밤에 아궁이에 불 때고 나서 구워놓은 고구마도 있어서 위기(!)는 모면 했습니다만 문제는 그런 마련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마누라님의 한마디 옥음 아닐까요? “여보, 밥이 조금밖에 없는데 어떡하지? 아침에 정신없어서 그만 깜빡했어. 오늘 그냥 가지 말까?” 이래 놓으면 천하에 그것 달린 놈치고 꽃구경 가지 말고 밥하라고 그럴까요? 부부는 살다보면 서로에게 길들여지게 마련이고 그 중에서도 남정네란 것은 아내의 손때가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이런걸 보면 제가 저번에 10갑자라 했던 마누라님의 내공에 약간 거품이 낀 것 아닌가 싶군요.

그런대 말이지요. 어제의 그 꽃구경이 미진했는지 오늘 또 가신 다네요. 그려. 요즈음은 크게 바쁘지 않은 까닭에 아침 먹고 조금 느긋하게 TV앞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데 설거지 마친 마누라님이 조금 서두는 듯 한 모습으로 빨래거리를 들고 수돗가로 가는군요. 그래서 제가 “천천히 하지 뭐 바뿐일 있어? 나는 오늘 집 주변에 풀이나 마저 깎으려네.” “나 오늘 빨래 얼른 해 놓고 야생화 전시회에 갈 거야” 이러시는 거겠지요. “아 어제 댕겨 오셨으면서 오늘 또 가? 어디로?” “교육청에서 야생화 전시회 한댔어. 어차피 엄마 목욕 때문에 읍에 나가야 하는 날이니까 간 김에 보고 온다는데 왜 그래애?” 말꼬리가 올라갑니다.

딴은 그러네요. 혼자 사시는 친정어머니가 거동이 불편 하셔셔 작년부터 2주에 한번 친정에 가서 밀린 청소하고 목욕탕 모시고 가는데 그것도 일부러 시간 낸다기보다는 몇 년 전부터 해금 배운다고 일주일에 한번 나가는 것을 격주마다 조금 일찍 나가서 친정 볼일까지 보고 왔으니까요. 그렇긴 해도 은근히 배알이 뒤틀립니다. 그래서 괜히 되지 않은 말로 시비를 차리려다가 그만두고 예초기 을러 매고 풀을 깎았습니다. 그편이 훨씬 제 정신건강에 좋으니까요. 풀이 제 아무리 끈질기고 징그럽다 해도 마누라에 대겠습니까, 제가 휘두르는 이 예초기 칼날 앞에는 당해내지 못하지요.

그렇습니다. 풀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어도 마누라님은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이 풀을 깎는 일은 재미있고 보람 있고 깨끗해서 기분 좋은데 맘대로 할 수 없는 마누라를 내 맘대로 하려들면 큰소리 아니 날 수 없고 그 뒤끝은 더욱 아니 올시 다지요. 다른 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저 같으면 지금 이 순간이 좋습니다. 계절의 눈부신 변화를 가만히 혼자 바라보면서 또 그 속에 살아 숨 쉬는 것들 느껴보면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져서 일하는 것도 좋은데 한집에 산다고, 애 낳고 산다고 아내가 나와 같을 리 없습니다.

달라도 많이 다릅니다. 어쩌면 극과 극처럼 다른데 또 희한하게 다르면서도 같으니 기막힌 부조화속에서 조화라고 할까요. 그래 오늘 풀 깎으면서 생각한 게 이런 겁니다. ‘부부는 옳고 그름이 없고 오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제 어록입니다. 일하다 말고 열시 반쯤 된 무렵에 안식구를 차타는 곳까지 모셔다 주면서 점심 혼자 먹으라는 빈말 한마디 못하는(!) 옆자리의 이 사람이 우습기도 하여 돌아보며 밑도 끝도 없이 “우째 그래 생겼노?” 했더니 “음… 마누라 이쁘다고?” 이러는군요. 그래 허허 웃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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