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예정된 일이긴 했어도 이 바쁜 철에 서울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날이 여름날씨가 된 탓에 몸에 걸치고 갈 것이 있어야지요. 집에서야 아침저녁은 쌀쌀하니 겨울옷을 입었다가도 벗어던지면 봄가을옷이요, 또 벗어 던지면 여름옷이 되지만 문 밖을 나서는데 그럴 수야 없었습니다. 그래 안식구 앞에서 걱정을 좀 했습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어디서 들어온 헌옷 중에서 골라둔 양복저고리에 맞춰 입게 진한 색깔의 면바지 하나 사다 달라 부탁을 했지요. 돈도 주지 않고서 말입니다.

마침 읍에 나갔다온 안식구가 바지 하나를 사왔더랬습니다. 원하는 색깔이 없다고 내가 말한 것보다는 좀 옅은 색을 사왔는데 안목 없는 제 눈으로 봐도 딱 촌스럽더군요. 아무리 이것저것 맞춰서 입어 봐도 영 어울리지가 않는 겁니다. 와이셔츠 하나가 반듯한 게 없고 양복저고리는 남이 입다만 것이니 오죽할까요. 안식구가 다시 안 되겠던지 바지 하나와 셔츠하나를 사왔습니다. 그래서 어찌어찌 입고 나설 수는 있었지만 남의 옷 몸에 걸친 듯 불편하고 어색한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긴 일 년 열두 달을 겨우 작업복의 구분만 있을 뿐 평상복과 외출복의 구분을 하지 않고 사는 주제가 무엇을 걸친들 어련하겠습니까만, 그러니까 어차피 촌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 촌스러움 속으로 들어가 버리자 생각하니 어렵쇼? 오히려 그것도 한 멋인 듯 그제는 괜찮아지더군요. 그래서 앞으로는 어디 외출 할 때는 촌스런 패션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났더니 기분이 유쾌해졌습니다.

서울이 아무리 익명성의 도시라지만 갈 때마다 남이 쳐다보는 것처럼 쭈뼛거려지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려집니다. 지하철을 타고 앉아서 가만히 살펴보면 사람들은 저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어 제가 무엇을 해도 신경 안 쓸 것 같기는 한데 그러나 꼭 누가 뒤에 붙어 다니며 야단이나 하는 듯 눈치가 봐집니다. 한마디로 집을 나설 때와는 달리 촌것이 패션이 되지 못하는 것이지요. 한번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그 넓은 대로에서 차 수십 대가 일제히 멈춰선 정지선 앞을 혼자 지나가려니 괜히 저 때문에 저 많은 차가 못가고 있구나 싶은 생각에 정신 놓고 뛰다가 그만 신발이 벗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찬만 부당하게도 그럴 리야 없는 것이지만 시골의 버릇이 몸에 배여 버린 것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서울에 있는 딸에게로 가서 그 애를 길라잡이로 삼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고 여유가 생겼습니다.

볼일을 어렵지 않게 마치고 나니 오후 일곱 시. 맘먹기로는 여차하면 막차로라도 내려와 버리려 했는데 고속터미널까지 도저히 시간을 맞추지 못할 듯해서 하루 자고 내일 첫차로 가려니 하고는 딸애를 대리고 집 근처의 시장에 들렸습니다. 아까 잠깐 딸애의 냉장고를 열어봤더니 집에서 보내준 김치 한 가지 달랑 눈에 띠더군요. 하여 혼자 있을수록 잘 챙겨 먹어야 된다고, 내가 생각해도 그리되지 않을게 뻔한 소리로 책망을 한 탓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아비명색이 왔다 가는데 그냥 말 수가 있어야지요. 두고 먹을, 딸애가 좋아하는 밑반찬 서너 가지와 찌게 거리를 사들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조그만 만두집 간판을 보며 “아빠, 저 집 만두 맛있어” 이러는군요. 제가 만두 좋아하는 걸 알고 사주겠다는 거지요. 그래 해 먹느라 부산 피우게 하느니 저녁을 대신  할 생각으로 그 집에 들어갔지요. 만두는 맛있었습니다. 직접 만들었다는 고기 덜 들어간 큼직한 만두에 담백한 육수, 그리고 여러 야채와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은 것이 어찌나 얼큰하고 시원하던지 땀까지 포옥 흘리며 정신 놓고 먹었습니다. 돈은 내주머니에서 나왔지만 딸 덕에 오랜만에 맛있는 외식입니다. 집에서 혼자 먹고 있을 아내 생각이 다 났으니까요.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막 수저를 놓고 땀을 닦고 있는데 TV뉴스가 시작되고 요즈음 여러 사람의 입길에 오르는 최아무개 홍아무개 변호사 사건이 나오는 겁니다. 전관예우다 불법이다 탈세다 하는 이야기들이야 끼리끼리 해 처먹는 그 아사리 판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새삼스러우리오마는 그러나 그 전관예우 받은 변호사들의 한번 수임료, 아니 일  수임료가 억 소리 백번이 넘어 가는 데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너무 서글픈 비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함께 만둣국을 먹는 딸아이는 제가 아까부터 오만 원가량 쓴 것에 대해서 가슴이 떨리고 불안하다며 사뭇 좌불안석이었어요.

뉴스를 보며 가만히 계산해보니 딸애가 일주일에 사흘 일하고 받는 돈은 기껏 20만원 남짓하니 저나나나 돈 쓰는 게 새가슴 조이는 듯 할 수밖에요. TV는 또 전두환이 5.18당시 발포를 명령하지 않았다는 신동아의 인터뷰를 전하고 있었는데 저는 자꾸만 노태우가 말했던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라던 게 눈앞에 오버랩 되었습니다. 광주의 진압작전을 해산작전이라 하고 쿠데타를 혁명이라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판을 치며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왜곡 조작하는 사회에서 우리 같은 시민들이 외마디 억 소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삼켜야 하는 모습은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서글픈 자화상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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