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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러 구하려는 것
2016년 07월 14일 (목) 10:29:58 박형진 시인 .
봄이면 찾아오는 꽃가루 알레르기 비염 때문에 술을 입에 대지 않은지가 꼭 석 달이 지났습니다. 어김없이 4월10일 무렵이면 코가 맹맹하기 시작하다가 점점 심해져서 송화 가루가 날릴 때면 절정을 이루고, 점차로 수그러져 6월20일쯤에는 시나브로 없어지는 게 제 비염의 특징입니다. 그것이 올해로 9년째. 증상을 완화시켜 보려고 별짓을 다 해보았는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이 기간에 술을 끊는 것입니다. 이 술 끊기도 올해로 5년을 채웠습니다.

꽃피는 봄날에 이루어지는 수없이 많은 화류계적(!)모임 때마다 술 잘 먹는 제가 술을 먹지 않고 앉아 있기란 서로에게 여러 가지로 불편한 일인지라 이 기간만큼은 술자리에 아예 끼지를 않지요. 그런데 그것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더이다. 우선 그 석 달이라도 술을 끊지 않고 계속 먹는다면 몸에는 틀림없이 병이 생길 것이니 어찌 보면 비염은 더 큰 병을 예방하라는 몸의 신호, 아니 조물주의 계시라 오히려 고마운 것이지요.

몇 달이라도 술을 끊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술을 끊고 2~3일 후면 우선 양치할 때 구역질이 나지 않아 살만 합니다. 입맛이 돌아오는 것은 당장 그 다음날부터구요. 최소 1주일 안에 화장실도 하루에 한번, 잠도 숙면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 술 생각이 나지 않을 리 만무합니다만 반듯이 끊어야 되는 엄중한(!) 상황인 때는 마음이 먼저 알아 그 생각을 간단히 물리치더군요. 술 끊은 사람들이 가장 위기에 처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분들과 함께 해야 하는 술자리입니다. 이런 분들이 은근히 술잔을 건네면 여간 강심장 아니고서야 물리칠 도리가 없지요.

지금은 차 없이는 못사는 세상이라 누구나 늘 운전대를 잡는데 술을 끊고 차를 몰아보면 참 아찔할 때가 많아요. 맨 정신이니까 그 아찔한 순간들이 바로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술을 먹으면 웬만한 것들은 무시해버리기나 인식하지도 못하고 그냥 내 달립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 운전을 했을까하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더 오싹해지지요. 그 무서움을 일찌감치 알아서 제가 트럭을 새로 산 3년 전부터 운전석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이런 경구까지 붙여놨어요. 나의 운전3금칙 ⑴음주운전금 ⑵과속운전금 ⑶신호위반금

그런데 말이지요. 참 이상한 게 있습디다. 술을 안 먹으니까 이제는 차를 몰고 마누라 옆에 태우고 시간 내서 어디든 가보고 싶은 곳을 가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는, 그런데 그게 참 안되더란 거지요. 평소 저의 운전 반경은 가능하면 읍까지만 차를 몰고 나가는 것이긴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조금 달라졌으니 멀리 나갈 법도 한데 집에 무슨 금송아지라도 모셔두고 있는 건지 그게 안 되는 겁니다. 물론 제 생활이 그 정도로 한만한 게 아니지요만 이유는 다른데 있는 듯합니다.

술을 끊고 1주일 2주일이 가고 한달 채우고 다시 두 달 세 달이지난 이즈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 현재 모습이란 건 완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았어요. 기분이 울적하다거나 장마 때문이라거나 그런 게 아니고 생활의 문제 그런 것도 아니고 달리 말하면 술 먹었을 때 정신의 상층부에 형성되었던 온갖 거품이 꺼질 만큼 꺼져서 맨 정신만 남았다고 할까요. 거품 낀 정신의 상태를 또 다르게 정신의 고양이니 뭐니 했었는데 그게 없어져서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물결하나 일지 않는 적막한 호수가 돼 버린 겁니다.

그런 상태를 제가 먼저 알아차리고 비가 부슬거린다던지 석양이 고즈넉하다고 느껴지던지 하면 가까운 마을의 막걸리 집이라도 가 보려고(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밖을 나서기도 여러 번이었어요. 바로 지척에 유명한 절집도 있으니 가보려고 차에 올라 앉아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예외 없이 다 중간에서 그냥 돌아오게 되더군요. 집에서 조용히 책을 보거나 집 주변을 거닐며 사색하고 싶은 거지요. 굳이 조용한 호수에 돌을 던지지 않고 물고기를 튀어 오르게 하고 싶은 겁니다.

소식 적에는 누구나 그러했겠지만 참 많이 헤매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구도자이기도 한냥 낯선 길 낯선 곳에 있는 게 제 존재의 조건이라도 되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여행이 가진 외향성 보다는 저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머물러 안으로부터 구하는 내향성인 듯합니다. 이런 저를 조금 못마땅하고 아주 조금 불만스럽게 생각하시는 분이 제 아내죠. 차가 있어도 여행이랍시고 어디 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읍에 있는 예술회관에서 하는 공연 한번을 같이 보러가지 않으니 당연한 건데 가끔은 저보고 ‘앉아서 장천리 보려한다’고 약간 코웃음도 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나름 또 이런 생각에 빠져있죠 ‘어떤 게 나의 본디 모습이냐’는 겁니다. 평생 먹은 술, 그리고 그로부터 말미암은 여러 가지 일들이 지금껏 저를 조성해 왔는데 일 년에 기껏 서너 달 끊은 술로써 나를 정의 할 수 있다? 코웃음 나오는 일이긴 합니다만 이번에는 조금 더 진지합니다. 장주의 나비까지는 아니더라도 본래 면목이 어느 것인가 고민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다손 치더라도 가벼운 것은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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