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아직 물러가지 않은 폭폭 찌는 더위 속에서 어제부터 본격적으로 깨밭을 맵니다. 올 깨는 두 번에 걸쳐서 300평정도 나눠 심었는데 지금 매는 것은 나중에 심은 것입니다. 처음 심은 것은 일찌감치 김매는 게 끝났지만 생각과는 달리 깨가 좋지 않습니다. 처음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릴 때 땅이 조금 말랐다 싶었어도 2~3일안에 비 온다는 말을 믿고 그대로 뿌렸어요. 그런데 비는 만족할 만큼 오지 않고 그대로 마른날이 계속되어 깨 씨앗이 갈 났습니다. 한꺼번에 고루 나지 않고 여러 날 동안 조금 조금씩 나는 것을 이 고장말로 갈 났다 합니다.

깨는요, 습기가 적당하다면 3~4일이면 일제히 싹이 나는 작물인데 또 습기가 맞지 않으면 스무날이 지났더라도 나기는 나는 작물입니다. 그러나 깨가 그렇게 갈 나면 나중 거둘 때 참 힘들어집니다. 콩과 비교한다면 콩은 다 익었어도 다른 일이 바쁘면 제자리에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놔둬도 꼬투리 한두 개 뙤고 마는데 깨는 뙤기 직전에 베야 됩니다. 베지 않으면 뙤어서 다 흩어져버리고 땅에 흩어진 낱알들은 콩과는 달라서 주워 모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늦게 싹이 난 것은 그만큼 늦게 익으니 그걸 남겨두고 하나하나 골라서 베기란 - 그래서 깨가 고루나지 않으면 차라리 갈아엎고 다시 심기도 하죠.

먼저 심은 깨는 약 반절정도는 쓸만하고 반은 못쓰게 됐습니다. 그래서 밭매기도 조금 쉽긴 했습니다. 지금 한창 꽃을 일궈내서 피울 준비를 하는 상태입니다. 두 번째 뿌린 깨도 상태는 별로 입니다. 이것은 습기가 알맞아서 나기는 참 기가 막히게 고루 잘 났는데 아직 어릴 때 강한 비를 두서 너 번 맞더니 군데군데 더러 죽거나 노랗게 시들거리는 군요. 아직 이파리가 돈짝만씩 한데 풀이 막 크는 중이라 들러붙어서 매는 중입니다.

아침 먹고 커피 한잔씩 마시면 저와 안식구는 깨밭으로 나갑니다. 그때가 대략 8시쯤인데요, TV프로 하나 보고 나간다면 30분쯤 늦어지죠. 이슬이 많이 온 날은 그때쯤 나가도 이슬이 가시지 않아서 장갑 낀 손에 흙이 많이 달라붙습니다만 그러건 말건, 아니 지금처럼 더운 날엔 사실 새벽부터 나가서 하고 늦은 아침 먹고 11시쯤 오전 일을 마무리 하는 게 좋긴 합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조금 게으르고 또 누가 보고 흉을 잡거나 상관치 않는 외딴곳에 자유스럽게(!) 사는지라 남 의식을 하지 않죠.

늘 옆에 나란히 앉아 밭을 매는데 어제는 어쩐 일로 제가 한 삼십분 늦게 나갔더니 안식구는 벌써 저만큼 앞서가는군요. 그래서 어쩌는가 보려고 “그냥 여기서부터 같이 매 나갈까?” “아 저리 가서 처음부터 매와.”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합니다. “흥 그리여 그럼” 이렇게 말하는 저는 마누라가 옆을 내주지 않는 것이 조금 섭섭하기는 해도 믿는 구석이 있으므로 처음 밭머리에서부터 제 골을 잡아 갔습니다.
제가 믿는 구석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안식구를 덜 심심케 하는 제 입심입니다. 제 안식구야 같이 밭을 매면 한나절이 가고 하루가 가도 이야기 한 자락 재미지게 못하는 사람입니다. 입에서 냄새날까봐 어째 그런답니까마는 원체 말수가 적고 과묵한 태생이라 고쳐지지 않더군요. 그래 갑갑한 제가 제 스스로 이야기에 빠져 저도 시간이 잘 가고 안식구도 지루하지 말라고 늘 이야기를 자청하곤 합니다.
제가 어떤 때는 어쩌는가 보려고 암말도 하지 않고 밭을 매노라면 나중에는 심심한 이 마누라쟁이가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청하거든요. 아 근데 이때는 핸드폰에 저장된 노래를 듣느라 제 이야기를 멀리 하더란 말입니다. 그놈의 핸드폰! 남의 좋은 금슬을 갈라놓는군요. 하지만 들은 노래 듣고 또 듣고 해야 무슨 재미가 있을까요. 기껏 한두 바퀴 돌리면 고만이겠지요.

오늘은 처음부터 나란히 밭머리에 앉았습니다. 어제보다 땅은 더 고실하고 밤새 구름이 낀 탓에 이슬이 잡히지 않아 매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제 이야기는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안식구의 핀잔과 눈 흘김을 밭으며 신이야 넋이야 남녀의 벌거벗은 밤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그걸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야기의 시초가 이렇게 아내 쪽에서 먼저 나왔기 때문입니다. “아, 밭 저렇게 묵혀두고 뭐 안 심으려면 나무라도 심어 놓으랑게?” 하는 그 묵은 밭은 바로 깨밭 옆의 보리베어내고 놔두어서 바랭이가 퍼렇게 자라는 밭입니다. “자네가 밭 매는 것을 싫어 허니 밭을 묵혀 두는 거여, 조금만 부지런하면 왜 묵혀두나.” 이랬더니 제 말에는 대꾸 않고 재차 나무 심지 않고 놔두는 게 제 잘못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군요. 제가 조금 역정이 나서 “아 밭을 1년을 묵혔어 2년을 묵혔어 이제 겨우 한철도 아닌데 난리여, 비료 농약 쓰지 않으믄 나무가꾸기는 쉬운 줄 알아? 남은 식전 해정 일거리도 안 된다고 하는 넙덕지만헌 요것도 혼자 못 매고 남편 옆에 앉혀 놓는 주제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됐을 것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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