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음력 유월 열이렛날은 양력으로는 7월 20일이었습니다. 큰 더위인 대서를 이틀 남겨 놓은 날이지요. 한마디로 여름의 더위가 절정인 때인데 이 날이 꼭 저희 아버님 기일입니다. 여름제사 지내보신 분들 다 아시겠지만 음식 한 가지를 하려해도 땀으로 멱을 감아야 하고 해 놓은 음식도 한 나절 넘기기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요즈음은 음식을 거의 다 거실과 마주한 실내 주방에서 만드니 하루 종일 집안 전체가 그야말로 찜통속이 되지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희 큰댁이 에어컨이라도 있어서 견딜 만 했다는 것입니다.

제사라고 서울에서 셋째 형님과 제 바로 위엣 누님이 내려 왔습니다. 큰 누님 둘째 누님과 큰 형님이 벌써 편안한 곳으로 가버렸으니 7남매 중 저를 포함해서 아들 셋 딸 하나 남았습니다. 올 제사는 조금 특별하다면 특별했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46년째인 올해를 끝으로 어머니 제사와 합하기로 했거든요. 어머니는 돌아가신지 16년째이고 음력 삼월초아흐레가 기일이어서 세상 사람들이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춥도 덥도 않고 시절 좋은 어머니 제삿날에 아버지를 모시기로 한 겁니다.

제사를 모시고 난 이튿날 셋째 형님은 올라가고 누님만 남아서 사흘을 더 묵새기다 갔습니다. 제사가 수요일이었는데 다니는 직장에 휴가를 냈던 겁니다. 누님은 저와 두 살 터울입니다. 저는 막둥이이고 누님도 딸로는 막내인데 버릇없는 제가 사사건건 누님을 이기려고 덤벼서 어릴 때는 쌈을 많이도 했답니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출타를 하시고 집안에 누님과 저만 남아서 집을 보는데 그날도 제가 못된 성질을 부려서 누님과 싸웠습니다. 싸우고 말았으면 의례적인(!) 일이겠는데 그날은 무슨 맘을 먹었는지 누님이 아끼는 분홍 블라우스를 입었고 싸움 중에 제가 그 옷을 찢었던 겁니다.

제가 참 엔간히 망나니짓을 한 거지요. 저도 그러고는 울고 있는 누님을 놔두고 겁이 나서 밖으로 도망쳐서 해가 저물도록 집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걱정된 누님이 저를 찾아 나섰더군요. “집에 가자” 다정한 누님 말에 저는 그만 울음을 내놓고 말았습니다. 그 뒤부터는 누님에게 감히 대들지 못했답니다. 강함은 부드러움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벌써 알아버렸는데 시대가 변했는지 지금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군요. 저의 누님은 아명이 ‘야물니’입니다. 말도 똑똑 떨어지고 심부름 잘하고 손으로 못하는 것이 없어서인데 성깔도 정말 셉니다.

제가 아까 제 성질이 망나니라고 하긴 했지만 누님도 한번 성질이 나면 고양이처럼 앙칼지고 표독스러워 또 다른 별명이 노랑 방카지 랍니다. 바다에서 나는 민꽃게를 여기서는 방카지(본디 이름은 박하지)라고 하고 그중에서도 누리끼리한 색을 띠는 놈이 유달리 사나워서 두발을 쩍 벌리고 사람 물려고 덤비면 누구든 섣불리 잡지 못하는데 제 누님이 꼭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까 누님이 저에게 질 리가 없지만 동생이라고 봐준 것을 제가 잘못알고 함부로 덤빈 거죠.

싸리비가 붓질한 마당 귀퉁이/ 한데 귀 우그러진 백철 솥을 걸고/ 뒷낭 도토리 영근 마른 푸나무/ 활활 때서 그들먹 수제비 한 솥/ 끓어내 볼거나 밀대 때서/ 끓일거나/ 맷방석에 간 밀가루, 기울 내리던 손/ 땀방울 볼에 연지를 찍고/ 고양이 놀래 달아나는 뒤란/ 울섶에 애 호박 뚝 따 채 썰어설랑/ 끓일거나 희디흰 종아리/ 맨발로 둥둥 앞 펄 달려가던 뉘의/ 검은 머리채보다도 더 검은 모시조개/ 한 박적 캐다 넣고 끓일거나/ 그 박적 정하게 씻어 한 가득/ 울타리 너머너머로 건넬거나 어느새/ 장독 옆에 분꽃피고 달맞이 피고/ 박꽃피고 박쥐 날고 어느새 뒷낭에/ 소쩍새 울고 소 모깃불 놓으시던/ 아버지 생각에 어느새 내 눈// 뿌옇게 저녁안개 끼고 …

수제비란 저의 시입니다. 시에서처럼 누님은 집 앞 개펄에서 조개를 잘 캤습니다. 그중에서 지금 이맘때는 까아만 모시조개를 캡니다. 반찬 없을 때면 보리밥솥에 불 한 소금 매어놓고 호미 들고 바가지 챙겨서 개펄에 가서 조개를 캐다가 호박 국을 끓이죠. 예전 그 생각을 놓지 못해서 누님은 시골 친정에 올 때마다 개펄 안부를 묻습니다. 그러나 그 개펄이 지금은 개펄 체험 장으로 변해서 모시조개는 어느 구석에 숨어 박혔는지 누님을 안타깝게 합니다.

밭을 매는 것도 선수예요. 요즈음은 저희가 깨밭을 매는 중인데 제사지낸 그 이튿날 누님은 저의 깨밭을 한나절 매 주셨습니다. 예전 솜씨가 죽지 않아서 저와 제 아내의 몫만큼을 매더군요. 그런 속도로 그 이튿날도 또 그 이튿날도 누님과 밭을 매면 깨밭은 끝날 것이겠지만 무릎수술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는 불안하기만 하여 자꾸 누님을 말렸습니다. 예전에 밭 매던 것도 서울에 살면 다 그리운 것이 되는 가 봅니다.
비단 서울 사람만이 그럴까요? 여름이란 계절 속에는 참 많은 그리운 일들과 이야기가 있어 저는 제 시속에 드러내 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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