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일도 별로 없고 심심할 때는 오히려 그런 지인이 반가웁기 조차 하지요. 저는 집 근처에 유명한 해수욕장을 끼고 살기는 해도 일 년 열두 달을 두고 남사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물 한번 들어가지 않지만 아주 가끔 손님이 와서 불러내면 그때나 핑계 삼아 해수욕도 잠깐 합니다.
더위가 초절정인 말복 무렵에 올 들어서는 그런 손님이 처음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안면은 전혀 없는 분이지만 제 팬이셔서 여러 번 서신을 주고받은 사이입니다. 중학교 2학년짜리 아들과 함께 왔다고 해서 해수욕장의 쉬실만한 곳을 한군데 지정해드리고 저는 잠시 후에 그곳에 도착했지요. 해수욕장은 막바지 더위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꽤나 붐비고 한낮의 열기가 더해져서 저처럼 산속에서 있다 나온 사람으로는 숨이 막혀서 잠시도 괴로울 지경이었습니다.
아무리 학생이 있다고 해도 점잖은 초면에 덥다고 물에 들어가자 하기도 쑥스럽고 그렇다고 주변에 차분하게 앉아 이야기 나눌만한 곳은 없어서 할 수 없이 저는 손님을 모시고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지요. 물론 시원한 맥주도 몇 병 사가지고요. 저희 집 울안에 그늘 좋은 나무가 있고 그 밑엔 평상이 놓여 있어서 바람을 쏘이며 앉아서 쉴만하거든요. 그분도 저희 집에 오셔서야 더위에 질린 얼굴이 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리 잡고 앉아서 나누었던 이야기도 옛날의 여름나던 이야기가 될 수밖에요.
알고 보니 손님은 예전에도 저 사는 동네의 해수욕장을 서너 번 다녀갔더군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자하니 저의 동네가 지금과 같은 관광지가 되기 전의 모습을 꽤나 많이 기억하고 있으면서 예전의 모습이 이런 식으로 변한 것에 안타까움을 드러냈습니다. 하기는 아름다울수록 빨리 찢긴다고 어떤 시인 한분이 저 사는 곳을 비유했는데 그 빨리 찢기는 것을 옆에서 부추기는 것 또한 예술가들이거나 글을 다루는 사람들이기 쉽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름만 대면 금방 알 수 있는 어떤 분은 저의 동네 해수욕장을 일러 이렇게 이야기 했답니다. “세계를 다 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게 될 것 같은, 안식을 주는 해수욕장이다.”
저 또한 변변찮은 글이나마 쓰는 사람으로서 행여 그런 대열에 설까봐서 많이 조심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찾아오는 분들을 막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아니 오히려 예전의 모습을 그리워 하는 분들이라면 해수욕장의 나무하나 돌멩이 하나 소홀하게 대할 리 없으니 그런 분들이야 자주 오실수록 반갑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는 해수욕장을 지키고 있던 몇 백 년씩 된 노송입니다.
바닷가라 해송이 있을법하지만 이곳은 붉은 육송이 해안사구를 울창하게 장식하고 있어서 참으로 절경이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거의 다 없어지고 군데군데 눈으로 샐 수 있을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래언덕도 무너져 내리고 거기에 무성하던 사구식물들도 거의 다 사라져 버렸어요.
꾸지 뽕 나무가 유달리 많았지, 칡넝쿨이 얼크러져서
뒤 꼭지에 있는 동네도 그만 보이지 않는 곳
어느 땐가 북실 양반이
그 옆댕이 송전에서 칡을 걷는데
저 끝을 붙잡고 누가 똑 같이 댕기는 소릴 해서나
칡 뻗어간 소나무 사이로 따라가 봤더니
아이쿠! 해골바가지가 물고 있었다는 곳
인공 때 사람이 많이 죽은 데라고들 했지
참말로 소나기라도 한바탕 쏟아 질라고 해봐
영락없이 송전 언덕배기는 와그락 다그락
귀신 도깨비들 돌 담으락 져다 붓는 소리 땜에
들놓을 때도 못 돼서 호미 던지고 달아왔다고
동네 아짐들은 식은땀을 흘렸어
하지만 소나기 그친 뒤 저녁햇살은 어느새
희디흰 뭉게구름과 붉디붉은 붉새를 만들고
장불에 널린 그 까만 바둑 돌
닳아진 조가비만큼이나 많은 해당화 꽃들은
붉새처럼 붉게만 피고 있었지
지금은 유명한 해수욕장이 되어서
피서 철 주말이면 사람구름이 피는 곳
귀신 도깨비가 이제 나살려라 도망가겠네
박형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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