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놈의 날씨가 종잡을 수 없을 정돕니다. 제발 오라고 빌고 빌 때는 단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던 하늘이 수확기에 접어든 요즘 벌써 보름째 비를 뿌리니 감당이 되질 않습니다.

탄저병 예방을 위해 매실액과 식초 혼합액을 넣은 분무기통을 둘러메고 지독한 여름날도 버텼던 고추도, 쉴 새 없이 열매를 맺어 입을 즐겁게 해주던 방울토마토도 무르고 갈라지고 맥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져 버리니 그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그나마 비오는 사이사이 잠깐씩 얼굴을 비친 햇살에 조금씩 수확했던 고추조차 어쩌지 못하고 가정용 건조기에서 말려야 될 지경이니 이래서야 무슨 재미로 농사를 짓겠습니까.

작년에 해거리로 열매를 맺지 못했던 마당 감나무도 이 지긋지긋한 가을장마를 견디지 못하고 몇 개씩 열매가 떨어지더니 급기야는 지붕을 때리며 떨어지는 낙과 소리에 잠이 깰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고 일어나면 마당 한가득 채 익지 않은 채 떨어져 깨진 감과 낙엽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니 원수가 따로 없습니다. 이것들을 그대로 놔두면 제 혼자 발효돼 온갖 날벌레들이 극성을 부릴 뿐 아니라 자칫 발이라도 잘못 디디며 미끄러질 염려가 있어 하루 일과의 시작이 열매는 주워 밭으로 던지고 낙엽은 쓸어내는 일입니다.

밭 주위 여기저기 단감나무는 물론 남의 집 감나무들도 잎이 노랗게 변하면서 열매가 전부 떨어져 버리니 올해 곶감은 고사하고 떫은 감조차도 맛보기가 어려워 졌습니다.

8월 하순 경 모종을 사다 심어놓은 배추는 알 수 없는 벌레들이 빗속에서도 어쩌면 그렇게 먹어대는지 그야말로 목불인견입니다. 거의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갉아 먹어도 손 쓸 엄두가 나질 않는 것은 희석한 목초액 같은 것을 뿌려본들 비가 계속 되니 영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놈들이 실컷 배불리 먹고 자리를 뜨기만 바라는 처지가 한심해 확 농약을 쳐버리고 싶은 유혹이 불쑥불쑥 일어나는 게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나마 시차를 두고 심었던 무와 쪽파는 그럭저럭 자라고 있어 위안을 삼고 있지만 이 긴 가을장마에 어떤 결과가 될지는 하늘만 알 일입니다.

하늘이 비를 뿌리든 말든 추석은 어김없이 다가왔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도 올해 같아서는 그저 남의 동네 얘기에 불과합니다. 서울 유명 사립초등학교 교장을 두 번이나 연임할 정도로 신망이 높았던 아래 동생이 재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퇴임한지 불과 한 달 만에 뇌종양 판정을 받고 수술한 게 올 초였습니다.

수술도 잘 되고 예후도 좋아 모두들 완치될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다시 반대편 뇌에 더 큰 종양이 생기면서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2차 수술을 8월 중순에 받았지만 그 후 아직 의식을 회복치 못하고 있으니 명절이라고 뭐가 즐겁겠습니까. 아이들에게 줄 이런저런 먹을거리와 말리고 있던 고추까지 싸들고 서울로 향하는 마음이 가을장마만큼이나 무겁고 추적거립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간 비웠던 집안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마당은  떨어진 감과 낙엽으로 빈틈이 없을 정도고 부엌은 그동안 환기가 제대로 안 된 탓인지 곰팡이 세상이 돼버렸습니다. 비도 이정도면 가히 금메달감입니다. 무려 3주에 걸쳐 사이사이 반나절 정도 해가 나고는 계속 많던 적든 내렸으니 말입니다.

물에 젖은 밭은 밟으면 미끄러질 정도로 질척거리는데, 그 와중에서도 두더지는 제가 다녔다는 표시로 배추밭이건 들깨 밭이건 길을 냈으니 이제 막 싹이 오르는 적갓과 총각무가 그 등쌀을 이겨낼는지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게 됐습니다.

이제 그만 그칠 때도 됐건만 일기예보는 다시 16호 태풍이 몰고 올 비구름을 경고하고 있으니 올 농사는 그만 포기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자니 어디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잠시 비가 그친 짬을 이용해 아직은 물러 떨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홍고추를 따겠다고 집사람이 밭으로 향합니다. 이래저래 농사짓는 일은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이 하는 일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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