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만명부인(이경화 분)이 아들 김유신(이종수 분) 앞에 머리카락을 잘라 보여 주며 천관녀(박시연 분)를 만나지 말라고 단호하게 얘기하는 장면. 
 
준엄한 훈육으로 김유신을 장수로 키워



▶골치 덩어리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항아리로 퍼 붇는 것 같은 비는 그칠 기색이 없다. 숙흘종(肅訖宗)은 요즘 딸 만명(萬明) 때문에 근심이 그칠 날이 없었다.
하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딸이 금관가야 왕족 출신 김서현(金舒玄)과 은밀히 만나며, 함께 잠자리까지 하는 것 같다는 소문이다.

말 많은 하인 녀석들은 끼리끼리 모여 “아가씨가 시집도 가기 전에 아기씨를 낳는 것 아냐?”라며 히히덕거리고 있다. 숙흘종의 가슴은 가마솥단지 속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김서현은 금관가야 왕족출신으로 신라에 투항해 신분을 보장받은 ‘준’ 귀족집안의 자식이긴 하지만 신라의 정통귀족들은 이를 은근히 차별했다.

정치적 배려와 정략적 계산으로 그들에게 ‘진골’ 타이틀을 달아주었으나 사실상 그 아래 등급인 6두품 취급을 했다.
“딸이 미래가 불투명한 놈과 혼인하게 할 수는 없다”

숙흘종은 불미스런 소문이 계속되자 화를 참지 못하고 딸을 창고에 가두어 버렸다.
몰래 먹을 것을 넣어주다 주인에게 들킨 하녀는 “물만 넣어주고 다른 건 일체 주지도 말어”라며 버럭 소리치는 숙흘종의 고함에 그만 엉덩방아까지 찢고 말았다.

▶“우리 도망가요”
‘번쩍’ ‘번쩍’ ‘우르릉 쿵쾅’...
새벽녘에는 천둥번개가 어찌나 울려대던지 숙흘종은 은근히 딸이 걱정됐다.
“아침에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단단히 야단치고 꺼내 주어야겠다”
이렇게 마음먹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큰일 났습니다. 아가씨가 없어졌습니다” 창고 문을 열었던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한 달음에 달려 간 숙흘종의 눈에 조그만 개구멍이 보였다.
큰 비로 약해진 지반 때문에 벽 밑에 생긴 틈을 무엇으로 파냈는지 구멍을 내고 ‘앙큼한 딸년’이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그 시각…
겁 없는 연인들은 이미 서슬 퍼런 숙흘종의 눈을 피해 경주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근심이 가득한 김서현이 물었다.
“뭘 어떻게 해요? 그냥 멀리 도망가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돌한 대답이 돌아온다.
‘나 참! 내가 만나는 여인이지만 이렇게 당차고 겁이 없을 수가 있나?’
김서현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숙흘종은 어찌 어찌해서 만명을 다시 찾아오기는 했지만 딸은 아비의 말을 듣지 않는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숙흘종은 김서현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녀석(김서현)을 언제라도 잡아들여 요절낼 수 있지만 김서현을 저렇게까지 사랑하는 딸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

숙흘종은 압력을 행사해 김서현을 멀리 만노군(지금의 충북 진천) 태수로 발령 해 딸과 떨어지게 하려고 했다. “좀 떨어져 있으면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그런데 딸은 이번에도 아버지의 감시망을 뚫고 기어이 김서현을 따라 나선다.

▶금빛 갑옷의 동자
충북 진천은 지금은 우리나라 중남부에 속하지만 당시(서기 590년) 신라로서는 위험한 북쪽 국경지대였다.
진흥왕 시절 확보했던 많은 영토를 다시 빼앗겨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던 접경지대였던 것이다.
경주에 비하면 시골이요, 변방이었으나 만명은 김서현과 함께라는 사실만으로 너무나 행복했다.

어느 날 아침, 만명은 간밤에 꾼 태몽을 남편에게 들려주었다.
“어제 밤 금빛 갑옷을 입은 아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품안에 안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이 귀한 자식을 주시려 나 봅니다”
만명은 신라 진평왕 17년(서기 595년) 진천에서 김유신을 낳았다. 전설에는 김유신을 20개월 동안 잉태했다고 한다.

▶준엄한 어머니 만명
유신이 태어난 후, 아버지의 마음도 많이 누그러졌다. 아버지는 외손자를 그렇게 귀여워 할 수 없었다. 만명과 김서현은 진천에서 다시 서라벌(경주)로 돌아왔다.
만명은 유신에게 자애로운 어머니였지만 학문과 처세에 대해 엄한 스승이기도 했다.
유신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골격 또한 좋아 힘도 장사였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를 거느리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유신이 15세~18세 정도 돼서 한창 화랑으로서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을 때였다.
이 시기에 유신은 천관이라는 기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만명부인은 어느 날 부터인가 유신이 학문에 소홀히 하고 있음을 느꼈다.
아들이 매일 기방에 드나든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유신을 불렀다.

“여자의 치마폭에 빠져 넋이 나가 장차 나라의 큰 기둥이 될 재능을 썩히고 있는 미련한 자가 진정 내 아들 유신이란 말이냐? 네가 결심을 하고 나야만 내가 한 모금 물이라도 넘길 것이다” 만명부인의 말은 단호했다.

▶유신, 신라의 대장군에
유신은 그 날 이후 천관의 집을 찾지 않았다. 가슴 쓰라린 나날이었으나 그는 어머니의 말에 순종했다.

어느 날 유신이 잔뜩 취해 말 등위에서 잠이 들었다. 유신의 말은 늘 이 맘 때쯤 주인이 갔던 그 집으로 향했다. 바로 천관의 집 앞이었다.

천관은 한 동안 기별도 없던 유신이 오자 맨발로 뛰어나가 그를 맞았으나, 잠에서 깨어 난 유신은 ‘어머니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만든 말의 목을 단 칼에 베었다.

그리고 유신과 천관은 이 후 다시는 만나지 않았던 것이다. 유명한 ‘천관녀’ 이야기다.
유신은 전쟁마다 승승장구, 신라의 대장군에 오르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는 삼국병합의 주역이 된다.

만명부인은 우리 역사에서 신사임당, 한석봉의 어머니와 함께 아들을 잘 키워 낸 대표적인 어머니로 손꼽힌다.

아버지 숙흘종은 골치깨나 썩였던 당돌하고, 도발적인 딸이 자기아들을 그렇게 준엄하게 교육하는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 원! 자기들이 내 속 썩일 때 생각은 안 나는 모양이지?”라며 웃었을 것 같다.




<이런 저런 이야기>

만명과 김서현은 ‘야합(野合)’했다고 기록돼 있다. 중매가 아니라 그냥 둘이 바깥에서 만나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도 우물가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물 긷던 만명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며 “봄 동산을 날아가는 한 마리 나비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어찌 그냥 지나칠까?”라며 프러포즈 하는 김서현에게 “하늘 나는 기러기야, 망망대해를 건널 때 조심하지 아니 하면 물에 빠져 죽으리라“며 적당히 튕길 줄 알았던 만명부인. 둘 다 선수는 선수였다.

유신이 천관녀를 만나는 것을 극구 만류한 만명부인.
천관녀는 기녀가 아니라 당시 신라 고유종교의 여사제로, 신분이 낮은 자(김서현)와 결혼해 젊은 시절 적지 않은 고생을 했던 만명부인이 (유신의 출세를 위해) 아들만은 더 높은 귀족 집안의 딸과 혼인해 출세가도에 지장이 없기를 바라 결사반대했다는 해석도 나온다.

아무튼 김유신이 어머니에 말씀에 순종하는 ‘착한 아들’임에는 틀림없었겠지만, 그 역시 대단한 야심가요, 정략가요, 술수에 능했던 만큼 천관을 버린 것은 반드시 어머니에 대한 순종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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