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의 딸’, 두려움 떨치고 ‘민주화 투사’로 정부에 대항

  
 
  
 
미얀마는 태국, 말레이시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싱가포르 등과 함께 아시아대륙 동남쪽에 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해 있다. 한때 ‘버마’로 불리던 이 나라는 약 5천만 인구의 68%를 차지하는 버마족 외에 무려 200여개가 넘는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로부터 끝없는 내전과 갈등이 이어져 왔다. 서기 5세기경 이라와디 강(江)유역에 미얀마족의 첫 왕조가 세워진 이래 11세기에 발흥한 ‘바간’ 왕국은 한때 크메르제국과 함께 동남아시아에 양강 (兩强)체제를 구축하기도 했다. 1767년 태국의 수도를 점령할 정도로 막강했던 왕국은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서구열강이라는 새로운 힘 앞에 굴복했으니 1820년대 초부터 미얀마를 노리던 영국에게 결국 1886년 1월 1일을 기해 합병되고 말았다.
1930년대부터 미얀마에는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하며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나타난 미얀마의 영웅이 바로 ‘아웅산(1915~1947년)’ 장군이다.



1942년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을 내세우는 일본군을 끌어 들여 영국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아웅산 등 미얀마 독립투사들은, 이내 본색을 드러내고 미얀마에 눌러 앉으려는 일본군을 상대로 또 싸워야 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이 물러나자 다시 옛 지배 국 영국이 슬금슬금 들어왔다. 아웅산은 이때 영국 런던으로 날아가 영국 내각과 격론을 주고받으며 담판을 벌여 ‘완전한’ 독립을 쟁취해내고 말았다. 아웅산은 1947년 독립 신생국 미얀마를 위해 일하다가 반대정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1983년 우리나라 장관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수행했다가 참사를 당했던 아웅산 국립묘소가 바로 그 아웅산을 기려 만든 곳이다. 지금까지 아웅산은 정파와 계층, 종족을 떠나 미얀마의 영웅이자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아웅산 수지여사는 미얀마의 신화 아웅산의 딸이다.
1945년 6월 19일 일본과의 싸움에 여념이 없던 아웅산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장군, 따님을 보셨습니다. 얼굴이라도 보고 오셔야지요.”

그리고 딸이 태어난 지 2달이 채 못돼 아웅산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는다.
‘으음~ 이 아이가 태어난 후로 모든 것이 잘 되는 구나. 아가야 너희들이 살아갈 이 나라는 훌륭한 나라가 될 것이다. 아빠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싸우는 것이란다.’
아빠는 2남 1녀 중 막내딸인 아이의 이름을 수지( Aung San Suu Kyi; 발음은 사실 수치에 가깝다)라 했다.

넓은 세계로
그러나 아웅산은 딸이 세 살도 되기 전에 32살의 짧은 생을 마친다.
아웅산의 ‘반 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AFPEL)’은 1947년 4월 해방된 조국의 첫 선거에서 압승을 거둬 미얀마의 지도세력이 됐지만 그해 7월 아웅산과 각료들은 내각회의 도중 반대파들이 보낸 암살자들의 총탄세례를 받고 모두 사망했다.

수지의 어머니는 똑똑한 신여성이어서 정부의 외교부서에서 일했지만 남편의 죽음에 대해 서는 어떠한 의구심도 표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일생을 나라를 위해 싸웠던 남편에게 돌아 온 것은 서른 두 살의 처절한 죽음밖에 없었어. 남은 가족만큼은 절대 그런 비참한 죽음을 맞게 할 수 없어….’

수지는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평범한 계집아이로 자라났다.
15살이 되던 1960년 어머니가 인도 주재 미얀마 대사로 부임하자 수지와 형제들은 어머니를 따라 인도의 뉴델리로 이주했다. 수지는 인도 최고 명문대학 델리 대학교를 졸업했다.

‘정말 세상에는 배울 것이 많구나…. 내가 보아왔던 미얀마의 문물과 풍습만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야….이곳 인도만 해도 나라는 가난하지만 얼마나 심오한 철학과 학문을 가지고 있나! 좀 더 배울 것이 많은 나라로 가고 싶다. 그래 영국으로 가는 거야.’
수지는 델리대학교를 졸업한 1964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옥스퍼드대 세인트 휴즈 컬리지에서 철학과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했다.

영국인과 결혼
“어머니 저 잘 있어요.”
“그래 다행이구나….그런데 너 정말 영국 남자랑 사귀는 거 맞니?”
수지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

“우리는 영국의 오랜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청춘을 바쳐 싸워왔다. 아버지의 투쟁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런 네가 영국 남자와 사귀고 있다니…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이냐… 친척들에는, 아버지의 옛 동지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어머니의 낙심은 이해해요. 하지만 이건 민족이니 나라니 하는 그런 문제와는 다른 거예요. 이해해주시기 바래요 어머니. 저 그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휴~ 모르겠다. 그런데 그 사람 뭐하는 사람이니?”
“이름은 마이클 아리스라고 해요. 티벳과 히말라야 지역의 문화에 대한 전문가로 옥스퍼드대학 교수예요. 하버드대학에서도 강의했어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지와 마이클은 열애에 빠졌다. 수지는 공부도 열심히 했다.

연인 마이클의 인맥도 도움이 됐지만 우수한 성적의 수지는 졸업 후 뉴욕의 유엔사무국 행정 및 예산문제 자문위원회의 비서로 발탁됐다. 수지는 거기서 3년 동안 일했다.
1972년 수지와 마이클은 오랜 연애 끝에 드디어 신접살림을 차렸다.

두 아들 알렌산더와 킴을 낳은 수지는 행복했다.
1985년에는 일본 교토대에서 동남아연구소 교환교수로 재직했고 1987년에는 인도의 선진학문연구소에서 특별연구원으로 일하며 자신의 능력도 발휘했다.
수지는 행복했지만 조국 미얀마는 아버지의 옛 동지였던 ‘네윈’ 장군이 1962년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한 뒤 장기독제체제에 들어선지 20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투사(鬪士) 수지의 탄생
“여보 고향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장모님이 빨리 쾌차하셔야 할 텐데…”
1988년 4월 수지는 어머니의 병이 위중하다는 소식에 미얀마로 날아갔다.

‘아~ 얼마만의 조국인가! 이 공기 이 고향의 냄새’
그러나 고향으로 달려가는 차안에서 바라보는 조국의 현실은 참혹했다. 어딜 가나 시위, 시위 또 시위…그리고 무자비한 진압, 진압 또 진압뿐이었다.
25년 넘게 이어진 철권통치는 심각한 사회적 모순과 함께 미얀마를 세계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로 몰아넣었다. 대학생에서 청년층, 화이트칼라에 이어 농민, 도시노동자, 승려들까지 온 국민이 들고 일어선 그해 8월 8일, 드디어 일은 터졌다.

수지의 고향이자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수지는 시위대 한가운데 있지는 않았지만 민심의 거대한 파도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따당땅’ ‘따다다다당’ 불꽃이 튀었고 귀를 때리는 총성이 들렸다.
사람들이 피를 뿜으면서 픽픽 쓰러졌다. 내 나라 군인이 내 나라 민중을 학살하고 있다!

순식간에 수백 명의 군중이 피투성이 주검으로 변해버렸다.
수지의 가슴에는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웅산 장군의 뜨거운 피가, 버마(미얀마) 민족 영웅의 불굴의 정신이 수지의 가슴 속 저편에 숨어 있다가 활화산처럼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투쟁! 이 야만적인 정권과의 투쟁… 내 남은 인생은 이제 정의로운 조국을 향한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민심(民心)의 기적
수지는 즉각 움직였다. 그녀는 반정부투쟁의 선봉에 서서 민중들에게 호소했다.
“용기를 모으고 단결해 이 모순된 사회를 바꿔봅시다. 그러나 절대 폭력은 안 됩니다. 위대한 미얀마 국민은 비폭력으로도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영국과 유엔본부, 일본과 인도에서 능력을 검증받은 ‘국제통’ 수지의 지명도와 카리스마는 당장 미얀마 군사 정부의 큰 부담이 됐다. 8월15일 학생운동 지도자와 정부 간의 협상을 중재하는 내용의 공개서한을 발표한 수지는 9월24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목표로 만들어진 강력한 반정부 세력 전국민주연맹(NLD)을 창설해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군부일당체제에 대항하는 야당인 셈이었다.
해가 바뀌어 1989년이 됐다.

“수지여사. 당신을 계엄법에 의한 소요선동 혐의로 가택 연금합니다. 이 시간 이후로 어떠한 경우라도 집 밖으로는 나가지 못합니다.”
7월 20일 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지를 가택 연금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국민들을 향해 정의로운 세상을 외치던 수지는 그렇게 날개를 접어야했다.

그러나 다시 해가 바뀐 1990년 5월 27일 총선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여사님 우리가 이겼습니다. 485석 중 392석의 의석을 우리가 차지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제 일당이 된 것입니다.”
“아! 역시 우리 국민은 위대하구나. 잠자코 있고 수동적인 줄 만 알았던 민심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어. 국민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수지)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모든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고 국민을 현혹시키고 악질적으로 선동한 전국민주연맹의 모든 관계자를 체포 투옥 가택연금 한다.” 총선에서 참패한 미얀마 군부의 대응이었다.

나도 무서워요, 하지만….
수지의 투쟁은 짧지만 강력했다. 온갖 편법과 모략이 난무하는 미얀마 선거판에서 총선 압승을 거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세계는 아웅산 수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1990년 노르웨이 ‘래프토 인권상’을 탄 수지는 1991년에는 유럽의회로 부터 사하로프 기념상을 받았다. 그해 10월14일에는 미얀마의 민주화와 인권, 평화를 위한 헌신과 비폭력투쟁의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세계적 명사가 된 수지의 가택연금에 쏟아지는 비난을 견디다 못한 군부는 1995년 7월 수지의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그러나 찰거머리 같은 감시망은 어쩔 수 없었다.
그사이 어머니가 사망했고 남편도 전립선 암 선고를 받았다.
“여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정말 보고 싶어요.”

“내가 미얀마로 간다 해도 그들이 막는구려. 이대로 당신을 보지 못하고 눈감는가 보오.”
남편의 임종이 다가오자 군부는 수지가 남편의 임종을 지키려 출국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수지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이대로 출국하면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오지 못할 거야. 공항에서 입국 거부할 것이 뻔해.’

1999년 3월 남편 마이클이 사망했다. 수지의 가슴은 예리한 칼로 후벼 파는 듯 아팠다.
2003년 수지의 전국민주연맹지지자들과 군부지지자들 사이에 유혈사태가 벌어져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부에게는 좋은 핑계거리가 됐다.
“정부의 배려로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아웅산 수지가 반성은커녕 폭동과 선동을 일삼으니 다시 가택연금에 처한다.”

그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집안에 갇혀있다.
지난해(2007년) 미얀마에서는 또다시 대규모 민주봉기가 일어났다. 하지만 구심점이 없는 봉기는 어떤 결말도 없이 해프닝처럼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가냘픈 몸으로, 가족도 못 보면서 세계에서도 가장 강경한 군부세력과 싸우는 것이…무섭지 않나요?”
“어머 겁 없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나도 무서워요, 하지만 무서워서 포기하고 소신대로 걷지 못한다면 그거야 말로 정말 무서운 일이지요.”
어느 기자의 물음에 이처럼 답한 아웅산 수지 여사는 미얀마 민주화와 정의를 위해 오늘도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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