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선 영
국립축산과학원 양돈과 박사


노벨상은 과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산을 기금으로 1901년부터 매년 인류의 복지에 공헌한 사람들과 단체에 수여하고 있다.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의 5개 부분에서 수여되며 1969년부터 경제학상이 추가됐다. 20세기에 노벨상을 받은 여성 과학자는 9명에 이른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노력했지만 인정받지 못한, 심지어 공로를 빼앗긴 여성 과학자도 있다.

영국의 물질 결정구조를 분석하는 학자인 로잘린드는 유전물질(DNA) 구조 연구를 의뢰 받은 뒤, 유전물질 분자가 나선형 계단처럼 꼬여있는 것을 확인 했다. 그런데 같은 연구실의 윌킨스가 왓슨과 크릭에게 그녀의 결과를 몰래 보여준다. 평소 연구의 해결점을 찾지 못하던 그들은 그녀의 연구를 보고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Nature)에 발표한다. 이것이 1953년 세계를 놀라게 한 유전물질의 구조를 밝힌 논문이며 이 공로로 두 사람과 윌킨스는 1962년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다. 후에 두 사람은 로잘린드의 비공식적 연구결과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인정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노벨상을 수상하기 4년 전 1958년 로잘린드가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살아 있었다 해도 3명까지만 공동수상이 가능한 규정과 여성 차별 풍토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 대열에 들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처럼 과학의 역사에는 여성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벨상을 두 차례나 받은 퀴리 부인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파리 과학아카데미에서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독일의 리제 마이트너는 핵분열을 발견했지만 자신이 고용한 남성 연구원 오토 한에게 1944년 노벨화학상을 빼앗겼고, 중국계 미국인인 여성물리학자 우젠 슝 또한 1957년 같은 운명에 처한다.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과학자의 아내’로 머물러야 했던 독일의 천문학자 마리아 빙켈만도 있다. 그녀는 1702년 새로운 혜성을 발견했으나, 발견자는 남편의 이름으로 보고됐다. 그 후 여성 천문학자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과 냉대로 인해  천문대를 떠나는 등 빙켈만 역시 능력을 꽃피워보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어떤 사회활동이던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환경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진실 추구가 가장 우선시 되는 과학의 절대적인 원칙 앞에서 이러한 과학의 역사 속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은 여성 과학자들의 비율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 등으로 원활한 과학 활동에 어려움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부도 이러한 여성 과학자의 사회적 진출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정,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 운영 등이 바로 그것이다.

과학은 창조적인 생각과 관점으로 접근하여야 하는 학문이다. 이따금 과학자는 독립된 상황에서 단독적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강한 팀워크를 통해 결과를 도출하고 이를 검증한다. 여성이 가지는 강점, 남성이 가지는 강점이 조화롭게 융합되었을 때 과학부분의 노벨상도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에밀리 드 브루퇴유는 수학과학 토론장에 출입하기 위해 남장을 해야만 했다. 과학을 사랑하는 순수함과 인류의 행복에 공헌하고자 하는 인류애에 어찌 남자, 여자가 따로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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