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여성 결혼이민자는 ‘최초’보수성 강한 농촌에 도전한 ‘이장’

  
 
  
 
이번에 만날 주인공은 농촌여성결혼이민자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한, 마을 ‘이장님’인 박원복씨(38, 전북 익산시 성당면 내갈마을).

따라서 중국에서 시집온 여성이 보수적인 한국의 농촌사회에서 이장이 됐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사건이다. 그녀에게 이런저런 사연들이 쌓였을 거란 상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대체 어떻게 이장이 됐고,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즐거운 마음으로 취재요청 전화를 했다. 그러나 수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뜻밖에 싸늘했다. “다시는 방송타고 싶지 않아요” “죄송한데, 저는 인터뷰 하고 싶지 않거든요. 굳이 서울서 여기까지 오시지 마세요.”

기본적인 섭외가 이미 완료된 것으로 생각하고 취재준비를 하던 입장에선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차분히 설득해 볼 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자칫하면 펑크가 날 수 있는 상황. 다급하게 농촌정보문화센터 관계자에게 상황을 알렸다. 그러자 다시 설득이 시작됐다. 그리고 한 시간쯤 지나 ‘섭외 OK’라는 소식이 날아왔다. 설득에 성공한 것이다. 아무튼 다행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박원복씨가 왜 인터뷰를 거절하려 했는지 궁금해졌다. 익산에 내려가서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박씨가 사는 곳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성당면 내갈마을이란 동네다. 그러나 얼마 전 이곳에 조류인플루엔자(AI)가 발견됐다고 해서 이 지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근처의 익산 미륵사지 유적을 찾는 관광객도 씨가 말랐다. 취재진 차량 역시 함열읍으로 들어서며 길목에 서 있던 방역장비로 샤워를 받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이 AI 파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익산시에서 한참을 찾아 들어가야 하는 내갈마을은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박씨가 웃으며 맞아주었다. 처음에 인터뷰를 완강히 거절하던 것과 달리 표정이 밝았다. 그래서 냉큼 물어봤다.
“아니, 근데 처음에 왜 그렇게 인터뷰 안 하시겠다고 하셨어요?”

“하하, 네에, 그랬죠. 제가 이장 되고 나서부터 여기저기서 인터뷰하러 많이들 오셨거든요. 근데 한번은 방송국에서도 왔는데, 글쎄 아침부터 밤까지 사람을 붙잡아놓고 이리 해라, 저리 해라 괴롭히는 거예요. 인터뷰도 좋지만 생업이 있는 사람인데 정말 너무하더라구요. 그래서 ‘아, 이게 절대 좋은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아주 진절머리가 났어요.”

“그러셨군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방송국이 원래 그런 면이 있죠. 그럼 다시 인터뷰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건 왜인가요?”“또 전화가 왔는데 그러시더라구요. 제가 하는 이야기들이 나중에 저처럼 오게 될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구요. 듣고 보니까 그래요. 나 혼자만 생각하면 인터뷰 절대 안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한국 땅에 올 사람들 생각하면 작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역시 사려 깊은 분이었다. 말도 어찌나 시원시원하고 똑소리 나게 잘하는지, 정말 ‘이장님’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느낀다.

박씨는 요즘 밤마다 근처의 닭 가공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때문에 오전부터 낮까지는 수면을 취해야 한다. 달콤한 휴식을 빼앗은 것 같아 미안했다. 잠을 많이 못 주무셔서 어쩌냐고 했더니, 싱긋 웃으면서 괜찮다고 하신다. 그러면서도 한 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앞으로 방송국 인터뷰는 안 할래요!”
“그 동네는 남자가 없어 여자가 이장하냐?”

시어머니를 모시고 딸 한선이와 남편, 이렇게 네 식구의 살림을 꾸려가던 평범한 ‘농촌아낙’ 박원복씨가 내갈마을 이장이 된 건 2003년이었다. 원래 이장을 하시던 분이 물러나면서 새로 이장을 뽑아야 했는데, 마을에서 젊은 축인 박원복씨의 남편, 김경식씨(45)가 처음 물망에 올랐다.

“근데 문제가 생겼어요. 남편이 건설업 쪽에 자리를 잡으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는 거예요. 이장 일을 못한다고 봐야죠. 그러다 보니까 몇몇 분들이 남편 이름만 올려놓고 일은 나보고 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더라구요.”
“아, 그렇게 된 건가요? 처음엔 ‘남편대리’로 하게 된 거군요?”

“아뇨. 주변에서 그렇게 말씀하니까 갑자기 열도 받고 오기가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그렇게 할 거면 안 하고 만다. 하려면 당당하게 내 이름 걸고 하지’라고 말했어요.”

이렇게 말하는 박원복씨는 당시 일이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는지 어조가 강해졌다. 어지간히 맘이 상했었나 보다.
“그렇게 말하니까 그럼 저보고 하라대요. 그래서 내가 ‘할 거면 못할 것도 없지만 나 때문에 동네 창피당할까 봐 못하겠다’고 했죠. 그때 동네에서 제일 연세가 많은 어르신께서 간곡하게 설득하시더군요. 봉사하는 거라 생각하고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리고 내 입으로 뱉어놓은 말이 있는데 안 하겠다고는 못하죠. 그래서 이장 일을 맡게 된 겁니다.”

막상 이장이 되어 의욕적으로 활동해 보려던 박씨는, 그러나 이내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마주치게 된다.
“무슨 여자가 이장을 하냐.”

“그 동네는 남자가 없어 여자가 이장하냐.” 등등의 수군거림이 그녀의 귀까지 들려왔다.
박씨는 그런 말을 듣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말끝마다 “여자가, 여자가” 하는 소리도 너무너무 듣기 싫었다. 그래서 싸움도 많이 했다.

◇마을 버스정류장 설치, 스스로 한일 중 ‘가장 보람’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사실 제 성격이 ‘남자 같다’고들 하세요. 틀렸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말해야 직성이 풀리고, 옳다고 생각하면 뚝심 좋게 확 밀어붙이곤 하니까.

남자들이랑 회의하고 일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성격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사실 그렇잖아요. 남자들이 쭉 앉아서 회의를 하자고 하는데 여자 혼자 거기 들어가면 긴장도 되고 그렇거든요. 그때 면장님이시던 이우철 어르신께서 참 많이 도와주시고 격려도 해주셨어요. 그 외에도 믿고 도와주시는 어르신들, 무엇보다도 남편과 가족들 덕에 기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해요.”

그때 박씨가 이장이 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어르신 한 분이 직접 오셨다. 그분께 ‘이장님’ 자랑 좀 해달라고 했더니 ‘자랑할 게 너무 많아 탈’이라고 하신다. 김재연 할아버지(79)의 말씀이다.

“아이 우리 박 이장이야 능력 있는 ‘일등 이장’이지. 시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어. 어찌나 사리가 밝은지, 남자들도 꼼짝 못해 허허허. 중국에서 왔다고, 여자라고 뭐라 그랬다간 큰 코 다치지 암.”박씨가 이장이 되어 마을 전체가 활기가 돌게 되었다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다.
줄줄이 칭찬일색이다. 그녀 스스로는 이장으로서 한 일 중에 어떤 일이 가장 보람 있었을까.

“마을 버스정류장 설치한 거요. 옛날에는 버스정류장이 없어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아주 멀리까지 힘들게 걸어가셔야 했어요. 마을 앞을 버스가 지나는데 손을 흔들어도 세워주지도 않고. 버스 기사들이 아주 싸가지가 없어요. 아, 또 막 화가 나려고 그러네 하하. 아무튼 이거 해결했는데 그때가 제일 기분이 좋았죠.”버스정류장뿐이 아니다.

내갈마을 주차장 등 각종 편의시설들을 마련하는 데 박 이장이 앞장서서 나서는 등 한마디로 4년 동안 마을을 확 바꿔놓았던 것이다. 칭송이 자자할 수밖에…
<농림부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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