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4번에 빛나는 제3세계 여성 파워의 정점

  
 
  
 
현대 인도의 정치를 이해하려면 간디 가(家)와 네루 가를 알아야 한다.
1947년 8월 15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신생독립국 인도의 초대 수상에 ‘자와할랄 네루’(1889~1964)가 취임한 이래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인도 정국은 이 두 가문의 협력과 반목이 거듭되며 오로지 간디 - 네루 가의 ‘독점 리싸이틀’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인디라 간디(1917 ~ 1984)는 인도 초대 수상이자, 마하트마 간디와 함께 인도 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칭송받는 네루의 딸로 태어났다.

1942년 ‘페로제 간디’와 결혼함으로써 ‘간디’라는 성을 얻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인디라 간디는 마하트마 간디의 딸’로 알고 있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옥중에서 키운 딸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또 편지가 왔어요.”
“그래? 감옥 안에서 힘드실 텐데 그렇게 긴 편지를 자주도 보내시는 구나. 건강하시다는 증거니 신께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편지가 사실은 조금 지루해요.”
“호호. 그러니? 이번에는 어떤 내용이니?”
“스페인 인들의 남미점령 과정에 대해 쓰면서 제국주의들의 탐욕에 대해 쓰셨어요. 또, 행동하지 않는 정의감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아빠는 옥중에서도 항상 우리 가족을 생각하신다. 특히 너에 대한 사랑은 끔찍하시지. 아빠 편지는 그냥 편지가 아닌, 너를 가르치고 깨우치기 위한 교과서요, 성전(聖典)이란다. 기쁜 마음으로 새겨들으면서 읽도록 해라.”
기원전 3천년 경부터 인더스, 모헨조다로 문명을 꽃피운 유구한 인도역사는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세기), 쿠샨왕조,(기원전 1세게~서기 226년), 4세기에 절정을 이룬 굽타왕조 등을 거치며 16세기 무굴제국 때는 아프가니스탄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그랬듯이 이 나라도 19세기 들어 최강의 제국주의 영국의 힘에 휘둘리기 시작하더니 1858년에 기어이 직할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때는 1933년, 인디라 간디의 아버지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 독립을 외치며 영국에 저항하다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고 있었다.
1930년에 잡혀 들어간 이래 햇수로 벌써 4년 째.

감옥 안의 네루의 머리 속에는 인도 독립과 인도 민중의 계몽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온통 채우고 있는 또 하나의 그 것은 무녀독남 외동딸 인디라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었다.
아빠는 사랑스러운 딸에게 직접 가르치고, 권면하고, 다독이기를 원했지만 잦은 투옥으로 그렇게 못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래서 감옥에서나마 딸을 위해 편지를 쓰고 그것으로 딸을 교육했다. 벌써 만 3년이 넘게 쓴 편지들은 훗날 책으로 엮여 세상에 나오게 되니, 네루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명저(名著) <세계사 편력>이 그것이다.

꼬마 투사 ‘인디라’

인디라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교육관 사이에서 고통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녀가 현대식 교육을 받기 원했지만 할아버지는 여자의 교육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영국학교에 다니다가 할아버지의 성화에 다시 인도학교로 옮겼다가 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어린 인디라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디라는 역시 외향적인 성격에 가까운 소녀였다.
“어머니 전 잔 다르크 같은 여자가 될 거예요. 프랑스의 시골 소녀가 나라를 위해 그런 활약을 했다니 믿어지지 않아요.”

“할아버지 듣는데 그런 말 하지 말거라. 그나저나 얘야 내 몸이 많이 안 좋다. 병원에서는 결핵이라고 하는구나. 의료술이 발달한 스위스에서 치료를 받으라고 아버지가 이야기하신다. 너도 함께 가야한다.”

인디라는 어머니 치료차 가게 된 스위스에서 1년간 공부했다.(1926~1927년)
아버지의 편지교육과 함께 영국학교에서 배운 신학문에 이어 스위스에서의 짧은 수학은 어린 인디라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정말 유럽에는 배울 것이 많아.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합리적이고 지나치게 감정적이지 않아. 하지만 그런 그들이 세계 각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나라 민중들을 착취하는 것은 왜일까?’
인디라는 어머니가 치료를 마침에 따라 1927년 인도로 돌아왔다.

1929년 12살이 된 인디라는 아버지와 그의 친구 ‘모한다스 간디’의 비폭력주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고 자기 스스로가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머니 내가 조직한 애국어린이 단체는 ‘몽키 브리게이드’라고 해요. 아빠가 활동하고 있는 ‘인도 국민회의’를 위해 편지나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지요. 어린이들이라 의심도 받지 않으니 안전하지요.”
엄마는 딸의 영악함에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인디라는 독립투쟁 단체 ‘인도 국민회의’를 위해 은밀한 편지나 문서를 전달하는 당당한 꼬마 독립군이었던 것이다.

“인디라 각별히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한다.”
어머니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신분의 편견을 넘어

193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인디라는 영국 유학을 결심하고 옥스퍼드의 소머빌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이즈음 인디라는 인도유학생인 ‘페로제 간디’와 연애에 빠진다.

“네가 사귀는 페로제 집안이 장사를 하는 집이더구나. 우리 가문이 브라만 계급이라는 것은 너도 잘 알겠지? 아무리 서구인들이 인도의 계급사회가 전근대적이라고 떠들어도 우리에겐 우리 전통이 있는 것이다.”
(인도는 전통적으로 사람을 4개 계급으로 나누어 구별했는데(카스트 제도) 다른 계급과는 결혼도 하지 않았다. 네루가문은 브라만 계급으로 최상류 층으로 구분된다.)

“아버지는 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분으로 알고 있었어요. 카스트에 얽매여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과 결혼을 못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해요. 제발 결혼을 허락해 주세요.”

“절대로,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모든 것을 양보해도 그것만은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1942년 인디라는 결혼을 감행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분노와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도대체 어떻게 키운 딸인데…’

인디라는 마하트마 간디에게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네루는 우정을 나누고 존경해 마지않았던 간디의 설득이 있고서야 딸의 결혼을 인정했다. 인디라의 고집스러움과 집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신생인도의 탄생

인디라는 그러나 독립투사 네루의 충실한 조력자요, 헌신적인 부하였다.
그녀는 1942년 투옥된 아버지를 대신해 ‘알리하바드’라는 곳에서 대중연설을 하다가 체포돼 처음으로 투옥된다.
‘아~ 감옥이 이렇게 더럽고 불결한 곳이었나? 그리고 죄수들의 열에 아홉은 글자조차 모른다. 여기서 멍하니 세월만 보내지는 않을 거야.’

인디라는 그곳에서 글 모르는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1년이 넘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인디라에게 큰 선물이 찾아왔다.
1944년 첫 아들 ‘라지브’(훗날 인도 수상)가 태어난 것이다.

1946년 영국은 식민지 정책을 포기하고 인도에 독립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인도는 다음해 독립했다.
그러나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들의 피가 피를 부르는 끝없는 유혈사태는 신생인도의 어두운 미래였다.
결국 인도는 이슬람교의 파키스탄과 힌두교의 인도로 나뉘어 진다.
그러나 어쨌든 독립은 독립이다. 이 신생국은 이제 인도인들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

‘자와할랄 네루’는 인도의 초대 수상에 추대된다. 인디라는 수상인 아버지의 정치적 동반자요 조력자로 성장하며 정치 감각을 익힌다. 또한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배운 신념의 소산인 비동맹주의, 강력한 경제건설과 강병(强兵) 육성 등을 이제 오히려 아버지에게 강력하게 주장했다.
1955년이 되자 인디라는 ‘인도국민회의’의 2인자로 부생했다.

1962년 인도와 중국은 국경문제로 분쟁이 잦아졌다.
“인디라. 아버지가 중국과 마찰을 빚고 강경노선으로 일관하자 여기저기서 비판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우리는 영국의 식민지시대를 경험했고, 중국도 한때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점령당해 온갖 치욕을 당했지요. 중국공산당은 ‘타도 제국주의’를 외치던 사람들인데 그런 그들이 오히려 약소국 티베트를 무단점령 했더군요. 그들은 그런 자 들이예요. 중국이 우리 인도 영토에 눈독을 들인다면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해요. 전쟁을 겁내면 안 됩니다. 아버지의 판단이 옳아요.”

네루는 어느새 자기만큼 성장해 있는 ‘거물 정치인’ 인디라가 대견스러웠다.

현대 인도의 암마(Amma)

1964년 네루가 죽고, 인디라는 새 수상 ‘샤스트리’ 내각에서 부수상 직을 맡았다.
1966년 샤스트리가 죽자 인디라는 마침내 인도 수상에 선출되었다.
온갖 편견과 음모가 난무하는 인도 정치판에서 아무리 지명도가 높고 네루의 딸이라는 후광을 가지고 있었다 해도 인디라가 수상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인디라는 그저 부(副) 자가 붙은 자리에서 수상을 보필하는 것으로 족하지...아무리 그래봐야 여자인걸 뭐....’
인디라를 지지하는 자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인디라는 이후 1977년까지 10년 넘게 총리를 역임했고, 1980년 1월부터 1984년 10월 31일 암살될 때까지 무려 15년 이상을 인도 수상으로 일했다. 그 동안 인도현대화와 경제발전, 여성인권을 우해 위해 엄청난 일을 해냈지만, 말년에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한 숙청과 권력투쟁도 서슴지 않았다.

인플레를 비롯한 경제문제와 다민족과 다양한 종교로 인한 지역갈등을 때론 유화적으로, 때론 강경하게 대처하며 혼란을 최소화했다. 파키스탄이나 중국과의 갈등에는 전쟁까지 불사하는 강경함을 보이며 인도인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그녀의 재임기간 동안 인도는 명실 공히 제3세계의 리더로 우뚝 설 수 있었다.
1984년 6월 인디라 간디는 인도정부의 골치 덩이였던 시크교도의 성지(聖地) ‘황금사원’을 공격했다. 45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시크교도 사태는 막을 내렸다. 인디라는 이 사건 5개월이 지나 자기 집 정원에서 자기 경호원에게 피격돼 사망했다.

그 경호원은 시크교도였는데 시크교를 공격한 인디라에게 복수한 것 이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인도 수상을 지낸 ‘라지브 간디’는 인디라의 큰 아들이다.

라지브의 딸 ‘프리앙카’는 미래의 수상을 꿈꾸며 할머니 인디라의 영광을 재현하려한다.
인디라에 대한 온갖 설과 평가, 찬양과 저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현대 인도의 암마(Amma;인도발음으로 어머니의 뜻)로 불리는데 부족함이 없을듯하다.

10억에 가까운 인구, 광활한 영토, 다른 종교와 종족간의 끝없는 분쟁, 이웃 국가들과의 북경분쟁 속에서 현대 인도를 이끌어 온 그녀의 역정을 볼 때 과(過)보다는 공(功)이 훨씬 우세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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