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잠에서 깼더니 옆자리가 허전합니다. 아내가 없군요.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인데요. 아내가 마시다 만 커피 잔이 뜨끈합니다. 서둘러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배게 맡에서 아내의 전화기가 우는군요. 평소 꼼꼼한 아내이고 보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 일입니다. 마을 할머니 한 분이 뒷산 자락에서 우리 밭으로 내려 왔습니다. 다래끼라고 부르는 나물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등에는 자루  배낭을 멘 차림이었습니다.

아내는 인사 대신 풍선처럼 부푼 주머니와 배낭을 번갈아 보기 바빴습니다. 할머니는 커피 한잔을 다 드시고 내려 가시면서도 궁금해 하는 아내에게 내용물은 보여주지 않으시더군요.
‘으흥, 요즘 산에서 나는 게 뭐겠어?’

할머니가 남긴 이 한마디가 아내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우리도 가자! 아내가 외쳤습니다. 우리부부의 의사결정에서는 대개 저지르자는 쪽이 이깁니다.

그러나 이기는 쪽이 항상 옳거나 합리적일 수는 없는 법이어서 난처한 처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날이 그랬습니다. 마구잡이로 산속을 헤매면서 목표가 고사리인지, 두릅인지, 취나물인지, 머위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경험이 모자라 그것들이 잘 깃드는 곳마저 가늠할 수 없어 길까지 잃어가며 골에서 능선까지 샅샅이 뒤지는 발품만 팔았습니다.

아내는 내던졌던 호미를 다시 잡으면서도 서운한 눈치였습니다. 위로 삼아 다음에 가면 많지 않겠냐고 했다가 산나물에도 때가 있는데 다음이 어디 있냐는 핀잔만 잔뜩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나는 먹을거리와 약초에 열광합니다. 구석기시대 인류의 유전자가 살아 있어 채취 본능을 주체 못해서 그럴까요? 아니면 거저 얻을 수 있어서? 건강에 유익해서? 그저 재미삼아? 제 아내는 뒷산을 마을의 공유재산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산의 넓고 깊은 품이 토해내는 묵은 겨울, 봄나물은 그 산자락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나누는 방식은 복불복이라 단정합니다. 마을 할머니들께 평소에는 그렇게 곰살맞으면서도 매년 봄철이면 눈빛이 날카롭습니다.

“산에 할머니들 보이면 이미 늦은 거다.”
아내의 산나물 산행의 연륜이 이제는 십 년이 훌쩍 넘는데도 아내는 가끔 한숨을 짓습니다. 그럴 만도 한 게 할머니들보다 한 걸음 늦어 허탕 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언제 보아도 맥없이 느릿느릿 걷는 분들인데도 여전히 알짜 나물을 독차지 한다고 시샘합니다.

평생 뒷산을 누비며 그 속살을 속속들이 짚어온 분들이니 어찌 이길까 싶습니다만, 아내는 커피 한 잔을 채 비우지 못하는 조바심에 오늘도 속도전에 나선 셈입니다.

 아내가 돌아왔습니다.
“불 좀 대봐!”
수확이 쏠쏠할 때 아내가 하는 말입니다. 고사리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쇠기 전에 삶아 말리자는 것이죠. 저는 들어도 잘 모르는 뒷산의 이 골, 저 골을 대가며 아내가 무용담을 늘어놓습니다. 등산하고는 달라서 같은 시간을 걸었어도 훨씬 힘든 게 나물산행인데 신이 났습니다.

 “노루귀하고 금붓꽃도 봤어.” “와, 이따 또 가자. 나도 좀 보게.” “그럴까? 고추밭이 급한데... 에이, 가자! 두릅도 실하게 올라오더라.”
오늘, 산을 거슬러 오르는 아내의 산드러진 뒤태를 보게 되겠네요.


이번 호부터 경북 김천의 유기농사꾼 이근우 씨가 전하는 ‘덤바우 부부의 농사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근우 씨는 아내와 함께 김천 들녘 ‘덤바우’에서 산나물, 들나물, 채소, 과일, 꽃잎차 등 갖가지 농산물을 100% 유기농법으로 재배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나이 60에 이른 덤바우 부부의 알콩달콩, 티격태격 살아가는 삶의 이야기, 농사이야기가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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