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은 봄을 앉아서 맞이하는 법이 없습니다. 한 해의 농사를 새로 일구느라 계절의 변화를 음미하고 그 운치에 젖을 여유가 없을 뿐, 언제나 계절을 가장 앞서서 만나는 이들입니다.

이에 반해 도시인들은 자연이 희박한 인위적 공간에 사는 탓에 계절을 맞이하는 여행에 익숙합니다. 봄 마중 갔다가 그 바람에 실려 돌아오는 여정은 참으로 매혹적입니다. 우리부부 사는 곳에서는 매년 수도산 꼭대기에 자생하는 철쭉꽃이 피는 때에 맞추어 철쭉제를 지냅니다. 우리부부의 놓치기 싫은 봄맞이 행사이기도 합니다.

수도산 중턱에 이르자 안개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긴 머리칼에 결을 내듯 잔잔한 바람이 산을 곱게 쓸어내리는데, 온 산의 결마다 윤기가 말갛게 흐릅니다. 비탈에 난 가르마 같은 오솔길에 서둘러 발을 내딛습니다. 숲 기행의 시작입니다. 조릿대가 먼저 눈에 띕니다. 산허리를 빙 둘러 울타리 친 꼿꼿한 모습이 믿음직하군요. “아, 우산나물이다.”, “단풍취네. 어머, 요건 현호색이다.” 동행한 이들이 탄성을 지르며 만나는 들풀마다 일일이 호명하는 것으로 입산을 고하니 아이들까지도 신명납니다.

 아내와 제가 풀과 나무들의 가물가물한 이름들을 놓고 연신 입씨름을 벌이는데 “저기 앞쪽 아이들 줄에 끼는 게 좋겠네요.”라는 말이 들립니다. 마구 터져 나오는 별별 이름들 때문에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철쭉 순례 온 다른 이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아내가 제 손을 잡고 부리나케 앞줄로 가자 뒤에서 다들 껄껄 웃습니다.

종종 걸음을 하며 새삼 알게 됩니다. 단지봉은 해발 천 미터가 훌쩍 넘는데도 오르는 길이 험하지 않고, 가파른 비탈은 둘러가기도 좋습니다. 그 품이 너그러워 쉴 만한 자리에는 다복다복 들풀군락이 펼쳐져 쉬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줍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큰앵초꽃 군락이군요. 낮고 너른 잎사귀 위로 뽑아 올린 꽃대 위에 피어난, 붉지도 연하지도 않은 꽃잎들이 화사합니다. 안개에 젖어 희붐하니 꿈에나 보는 그리운 사람의 아련한 표정을 닮았습니다.

정상에서 곧장 떨어지는 바위절벽을 돌아나갈 때 만나는 것은 매화(또는 바위)말발도리입니다. 나무치고는 작고 앙증맞은 흰 꽃을 피우는데, 이들의 생태는 유별납니다. 대부분의 식물이 부드러운 흙에 뿌리박기를 좋아하지만, 이들은 바위틈만을 골라 자생합니다. 혹독한 여건인 바위투성이 위에서 경직되지 않고 오히려 유연한 자태로 꽃피우는 모습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윽고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그 비스듬한 턱을 받치며 높다랗게 선 철쭉을 만납니다. 하늘을 향해 내뻗은 가지마다 연분홍 손수건을 모아 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러나 안개를 타고 언제라도 흐를 기세로 굽이굽이마다 꽃물결을 이루었습니다. 고지의 풍파에도 주눅 들지 않고 옹골지게 버티고 선 모습이 의연하군요.

단지봉의 유래는 잘 모르겠으나, 오늘은 안개 항아리입니다. 넓고 깊은 흐릿함을 배경으로 나무와 풀과 사람들이 서로의 풍경이 되었다가 급기야는 단 하나의 풍경으로 뭉뚱그려지는, 그 때 찾아드는 고적감으로 완성된 철쭉기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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