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빗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듣자하니 제법 올 기세입니다. 저는 깜깜한 어둠에 대고 눈만 깜빡이며 기다립니다. 산과 들을 토닥이는 비와 그 허리를 가르며 지나치는 바람소리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어, 비다. 빨랑 나가서 묵나물 해놓은 것 좀 치우고 와봐.”

이건 제가 기대한 말이 아닙니다. 어리마리 잠에서 깨어나는 중에도 아내는 고작 나물 걱정이군요. 마뜩치 않습니다만, 괜한 지청구 듣지 않으려고 끙 일어나 농막 문을 열었더니 듣던 것보다는 빗발이 드셉니다.

채반에 널어놓은 쇠비름과 명아주를 되는대로 그러모으는데 비를 맞아 그런지 풋풋하면서도 설핏 비린내를 풍깁니다. 이 녀석들은 이른바 잡초들입니다.

밭 주변에서만 성하는 것들이라 그냥 잡초라고 부르기는 뭐해서 우리부부는 꼽사리풀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꼽사리풀의 대표 격에 해당하는 것은 이즈음에는 꽃 지고 사윈 냉이입니다. 냉이는 일찌감치 갈무리되어 냉동실에 차곡차곡 쟁여져있습니다.
이제는 명아주와 쇠비름으로 초여름임을 알게 되는군요.

아내와 함께 농막 추녀 아래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땅에서 발등으로 튀는 물방울이 차갑고, 불빛에 입김도 부옇습니다. “애들 잘 크겠다.” “물맛 시원하겠네.” 아내와 저는 깜깜한 허공에 대고 덕담을 한마디씩 하면서 해갈할 만큼 비가 오기를 기대합니다. 아내답게 걱정도 한 자락 늘어놓는군요. 비에 젖은 마늘대가 녹아버리면 마늘 캐기가 보물찾기와도 같아서 애를 먹기 때문입니다. 밭이 마르기를 기다려 캐자면 다른 일과 겹쳐 날 잡기도 쉽지 않습니다. 

 “마늘, 양파, 고추, 강낭콩, 옥수수, 참깨, 녹두, 호박, 오이, 가지, 아욱, 열무, 상추, 양배추, 레디시, 치커리, 시금치, 쪽파, 부추, 쑥갓, 자두나무, 매실나무...”

아내가 빗소리에 맞추어 우리 밭의 작물들을 읊습니다. 이렇게 옮겨 적은 것의 서너 배는 되는 이름들을 하나씩 새기는 게 무슨 시를 암송하는 것 같아 듣기 좋습니다.
“아니다. 녹두는 아니지.”

저는 이 대목에서 살짝 긴장합니다. 돌이 많아 늘 밭 갈기를 미뤄둔 곳이 녹두자리인데, 제가 여직 못 갈고 있기 때문입니다.

 “녹두는 단번에 수확하는 게 아니라서 너무 번거로워. 올해는 건너뛸까?”
“그래도 닭백숙에 함께 넣으면 좋던데.”
“그럼 진작 밭을 갈았어야지?”

이러다가는 우중환담이 거칠어질 것 같아 재빨리 화제를 바꿉니다.
“어, 당신 삼채 빼먹었다.”
“그렇지. 자기가 옮겨 심은 것만 기억하시지요. 그것도 아직 덜 했더구먼.”
수습이 잘 안 되어 머리를 긁적이는데, 아내가 말을 바꿉니다.
“비 그치면 보리수하고 산딸기 남은 거 따자.”

자두나 복숭아 같은 열매다운 과일이 나오기 바로 전에 익는 것들이 앵두, 보리수, 산딸기 등입니다. 덤바우에서는 그렇습니다. 거두며 한 알씩 맛보는 재미가 쏠쏠해 뙤약볕에서도 힘든지 모르는 일입니다.

 “당신은 보리수를 닮았어. 시고 달다가 뒷맛이 약간 떫잖아.”
 “댁은 산딸기 닮았고?”
 “그게 말이야. 응.”

 제가 산딸기의 훌륭한 속성을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하자 막아서며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새벽비가 이렇게 아득한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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