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피는 꽃은 밤꽃이 대표적입니다. 여우 꼬리처럼 부숭부숭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이산 저산을 누렇게 물들입니다. 이런 밤꽃을 보는 아내와 제가 바쁩니다. 몇 년 전부터 밭가나 둔덕의 빈자리에 꽃을 심어보려고 했는데요. 꽃 심는 때가 워낙 농번기여서 번번이 지나치고 말아 여러해살이 꽃을 몇 가지 겨우 심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올해는 부부가 작심을 하고 이른 봄부터 이런저런 꽃들 모종을 잔뜩 만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부부가 의기투합하는 바람에 너무 많아서 이미 꽃이 피고도 남았을 지금까지도 모종 심느라 허덕입니다.

모종판에서 이미 꽃을 틔워버린 채송화를 보며 아내는 게을러서 그렇다고 하고 저는 바빠서 그런 것 아니냐고 반문하고 그럽니다.

우리부부는 장차 우리 밭을 물들이게 될 꽃들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덤바우 모든 밭가와 둔덕, 개울가가 꽃들로 뒤덮이면 농작물을 갉는 해충들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실험을 통해 증명된 사실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다양한 들꽃들을 발치에서 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겠습니다. 바쁜 와중에 틈을 내어 꽃자리에 나는 풀을 솎아주며 잠시 쉬는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애초 우리부부가 꿈꾸던 산과 들 틈에 묻혀 느리고 고적하게 살기를 당장 실천하자는 의지도 제법 셉니다.

과수농사를 짓지 않고 밭농사를 주로 하는 농민들은 작물의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요즘 한창인 감자가 틔우는 꽃은 보이는 족족 따냅니다. 꽃대와 꽃으로 집중되는 양분을 차단하여 조금이라도 감자가 굵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채소의 경우는 꽃대가 서는 순간부터는 맛이 써지고 크기도 볼품없이 작아져 더는 수확할 수 없게 됩니다. 과거에는 작물들 중에 실한 것 몇 포기는 남겨 씨를 받았으나 이제는 그러지 않습니다.

판매되는 대부분의 종자가 생식능력이 퇴화된 단세대(F1) 종자여서 자가 채종해서 심으면 제대로 자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자는 굶어죽어도 베고 잔다는 말은 말 그대로 옛말이 되고 만 셈이죠.

아무튼 농민들은 작물의 꽃을 반기지 않는데요. 그 중에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양파의 꽃대입니다. 왕성하게 자라야할 봄에 꽃대가 선 양파 알뿌리는 드세고, 수확해 놓으면 금세 썩어버립니다. 올해는 양파가 풍년입니다. 날씨가 도와 알이 굵고, 더욱 단단합니다.

수확하려고 말끔하게 치운 양파 밭에 퍼질러 앉은 할머니께 다가갔더니 대뜸 이러십니다.
“이거 언제 다 캐나 말이다. 장마 온다는데.”

올해만 같으면 양파농사 지을 만하다는 말씀도 덧붙입니다. 양파가격 폭락 때문인지 아내와 제게는 양파 줄기가 사라진 너른 밭이 왠지 황량해보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는데, 아내가 “꽃모종 좀 드릴까요?” 하고 여쭈었더니 밭작물이 당신에게는 꽃이라고 하시며 손을 들어 양파 밭을 죽 긋습니다. 그 말씀에 꽃은 결실을 언약하는 편지 같은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차라리 할머니가 꽃이고, 언약이고, 편지라는 생각이 울컥 들었습니다. 굽은 손가락이 밭에 써온 언약의 글월이 어떤 사연인지는 제가 감히 알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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