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초여름에 가장 왕성한 것은 벌레들입니다. 날고 기고, 톡톡 튀는 것들이 우리 부부가 농사짓는 덤바우에 그득합니다. 사람을 성가시게 하고, 물리면 가려움과 통증을 동반하는 벌레들로 인해 애를 먹기도 합니다. 하루는 맨발로 농막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지네에 물려 데굴데굴 구른 적도 있습니다. 아내가 혀를 끌끌 차며 조심성 없는 저를 나무라지만, 그 역시도 벌에 물려 한쪽 눈이 퉁퉁 붓는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런 벌레들은 산과 들의 식물들과 가장 닮았습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풀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들의 생존과 생식욕구는 미욱할 정도로 끈질깁니다. 그들의 식욕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어서 배추 한통을 먹어치우는 데에 고작 며칠이면 충분합니다. 농작물에 워낙 영양이 풍부하고 식감이 좋다보니 거칠기 짝이 없는 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끊임없이 농작물을 위협합니다.

한 마리, 한 마리는 그렇게 약할 수 없는데 무리로 들려들면 이겨낼 재간이 없는 것이죠. 좀 과장하면 산과 들에서 거대한 해일처럼 밭으로, 농경지로 넘실거리며 덮쳐오는 계절이 초여름인 것입니다.

고추밭에서 풀을 매다가 풀잎에 매달린 풍뎅이 허물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연한 갈색으로 바랜 허물은 새 몸이 빠져나간 등짝의 틈을 빼고는 온전했습니다. 문득 제 몸을 벗고 나와 텅 비어버린 묵은 몸을 보는 풍뎅이가 무슨 생각을 할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과거의 제 몸을 온전히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하다 말고 그 허물을 사진 찍어 저 이랑 끝에서 일하는 아내에게로 가서 사진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얘들은 왜 원래 모습을 그대로 둔 채로 탈바꿈을 할까?” “음,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게 가장 힘이 덜 드는 모양이지.” 그럴 듯한 대답입니다. 산과 들에 깃들어 그들대로 사는 생명들은 너무나도 간결하고 합리적인 경제성을 추구하며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자신의 옛 모습을 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려고 그러는 건지도 몰라.”
제가 이렇게 말하자 아내도 저처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어서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고비 고비마다 허물을 벗으며 과거를 돌이키면서 새날을 맞는다, 우리 역시도 농사지은 세월, 어느 길목 어떤 모퉁이에서 여러 번 허물을 벗어왔겠다, 앞으로는 그 때를 기념하고 반성도 하자는 식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부부 사이에는 허물이 없다고 하잖아.”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저는 잠시 가슴이 출렁거리는 걸 느꼈습니다. 사실 벌레의 허물과 사람의 허물은 다른 뜻입니다.

벌레의 허물은 성장의 한 단계에서 벗게 되는 구태인 반면 사람의 허물은 실수나 잘못을 이릅니다.
“그런 걸 알면 잔소리 좀 덜하셔야지요.”
아내가 이런 제 말에 헛웃음을 치면서 되받습니다. “당신은 말이야. 쓸데없이 허물 걱정 그만하고 본인의 때를 좀 닦으셔야 해요.”
“사돈 남말하네.”
고추밭 고랑에 퍼질고 앉은 아내와 저는 잠시 하하 호호 웃었습니다. 웃음이 날아가 스러지는 서편 하늘가에는 노을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습니다. 아내와 저도 따라서 붉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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