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곳곳에서 트랙터 소리가 요란합니다. 양파, 마늘 심었던 밭을 가느라 그렇습니다.
쟁기에 갈린 흙의 불그스름한 속살이 물기를 머금어 촉촉합니다. 먼데서 보면 트랙터가 커다란 지우개처럼 보입니다. 수확하고 남은 작물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나면 밭은 말끔한 황토색 캔버스로 바뀝니다.
 
흙의 속살을 뒤집어 거죽의 굳었던 땅을 곱게 갈아내면서 트랙터의 주인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합니다. 회한과 기대가 뒤섞인 심사가 아마도 싸한 흙냄새를 닮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감상적이면 여태 농사를 지었을까.”

아내는 저와 생각이 좀 다르군요.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작물의 작기를 마칠 때마다 소출에 일희일비 하다가는 마음의 병만 얻을 뿐이겠습니다. 중후한 화가가 빈 캔버스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창의의 맥락을 궁구하는 자세와 농민의 밭갈이가 어찌 다르겠냐는 제 말에 아내는 픽 웃고 맙니다.

그나저나 우리부부 고추밭을 보자니 남 걱정 할 때가 아니군요. 이른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가뭄까지 겹쳐 할 일이 많습니다. 시커먼 비닐을 뒤집어 쓴 고추뿌리가 한낮 뙤약볕에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비닐 안 온도가 70도를 훌쩍 넘겨 오르거든요. 우선 아내가 이랑에 씌운 비닐의 배를 보기 좋게, 물 찬 제비처럼 달려가며 갈라냅니다. 허옇게 바랜 흙 거죽이 드러나는 모습이 화가의 힘찬 붓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 속까지 시원해지는 같아 아내 꽁지에 대고 외쳤습니다.
“조기 좀 비뚜네.”

다음은 제 차례입니다. 더위 먹었을 뿌리가 밥인들 제대로 먹었겠습니까? 수레에 담아온 퇴비에 이런저런 액비를 넣어 잘 비벼서 먹기 좋게 비닐 갈린 틈에 넣어줍니다.

아시다시피 고추는 새로 가지를 뻗을 때마다 고추를 하나씩 달기 때문에 웃거름을 자주 주어야 합니다. 포기 사이마다 주느라 끙끙 대는 저를 보며 아내 또한 한마디 합니다.
“거름, 이랑 밖으로 다 나가네.”

그러면서도 아내는 물통을 들어 나릅니다. 비빔밥 먹은 고추가 목 마를까봐 거름 준 위에다가 물을 듬뿍 뿌려주는 것이죠. 이러면 양양분이 흙에 골고루 잘 흡수되겠습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세상만사 모든 일에는 덤이 있는 법이라 거름 준 자리마다 풀을 덮는 일이 남았습니다.

“고추들아 마른밥 될까봐 덮어두었으니 체하지 말고 천천히 배고플 때마다 먹어라.”
힘든 일은 제가 다 했는데 생색은 아내가 내는군요.

“덥더라도 무럭무럭 고추 많이 달아라. 병치레하지 마시고.”
고추를 사람 대하는 듯 하는 게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는 해도 아내의 비나리가 낭랑해서 듣기는 좋습니다.

이렇게 한나절 고추밭에서 씨름을 하고나면 녹초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개망초가 제 키보다도 크게 자라 푸서리가 된 밭도 갈아야 하고, 채소밭으로 넘실거리며 넘어 들어오는 풀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은 급한데 날은 벌써 어둑해집니다.
“시원하게 막걸리나 한잔하자.”

달달하면서도 쌉쌀한 막걸리를 들이키는데 어디서 트랙터 소리가 들립니다. 올해 들어 유난히 농작물 가격이 안 좋아 기운이 빠질 법도 한데, 도리어 일을 다그치는 농민의 기세등등한 으르렁 소리로 들립니다.

“맞아, 우리는 좀 게을러. 그치?”
아내 말에 거푸 마시는 막걸리가 씁쓸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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