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작물, 특히 푸성귀를 많이 기르는 탓에 밭을 자주 갈게 됩니다. 요즘처럼 비가 잦으면 흙이 물러 제 때 밭갈이를 할 수 없어 애를 먹습니다. 흙이 좀 고슬고슬해졌다 싶으면 만사를 제쳐두고 관리기 끌고 밭갈이에 나서야 합니다. 두둑한 이랑까지 만들고 나서는 아내와 함께 비닐 씌우기를 합니다. 비닐을 적당히 펼쳐놓고 이랑 양옆에 나란히 서서 비닐을 팽팽히 당겨 그 끝을 묻어나갑니다.

농사 초년 시절에는 한 나절을 매달려도 마치지 못했던 일들을 순식간에 뚝딱 해치웁니다. 매년 우리부부가 씌웠던 비닐의 총 연장 길이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은 비닐 포장미술 위로 마술처럼 파란 싹이 돋아나 감자도 되고, 콩도 되고, 참깨, 들깨가 되어 무럭무럭 자랐던 풍경도 떠오릅니다. 

일 년을 하루같이 우리 부부가 이랑과 고랑에 참례하여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 보다는 모자란 거, 앞으로 잃을 것들.”
아내의 간결한 말이 맞는군요. 느지막이 시작한 농사라 숨이 턱에 찬 채로 달려오는 통에 길고 멀게 조망하는 안목 없이 살았습니다.

농사를 지은 해만큼 나이가 들었으니 머지않아 기력이 떨어져 과거나 지금처럼 농사짓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매사를 대하는 본새가 워낙 어설프니 아내나 저나 걱정이 많습니다.
며칠 전 내린 큰 비 뒤치다꺼리 하느라 이 밭, 저 밭 뺑뺑이를 돌다가 땀에 푹 절어 그늘에 널브러졌습니다.


 “아이고, 나중에 하고 좀 쉬자.”
“나중에는 그때 할 일이 또 있거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내 역시 풀썩 주저앉습니다. 일에 치이는 대다가 온습도가 높으니 짜증이 납니다. 짜증이라는 것이 원래 합리적 이유가 있어 나는 것이 아니어서 쉬 가라앉지 않습니다. 지레 풀이 죽어버릴 때까지는 별 수 없습니다. 이럴 때는 엉뚱한 짓이 최고죠.
 “업어줄까?”

아내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 제가 이렇게 말하자 아내는 기겁을 했었습니다. 그 당시 아내는 직업상 서서 하는 일이 많아 늘 다리가 아프다고 했거든요. 어느 날 못 이기는 척 업혔던 아내는 요즘도 가끔 업혀줍니다. 아내를 업은 채 다음 일터인 고추밭으로 가면서 제가 말했습니다.

“나 늙어서 못 업으면 어쩌지?”
 “나 허리 아파 못 업히면 어쩌누~”

최근 들어 아내와 제가 부쩍 관심을 기울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뭉뚱그리면 재배방식과 작물 합리화, 그리고 인프라 구축입니다.

말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라 80대에 들어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을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틀밭을 늘려 밭 관리를 단순화하고, 재배작물도 매년 조금씩 단순화하면서 주력 작물 중심으로 편제하려는 것입니다. 주거시설 역시 노후에 편하도록 개량하거나 새로 지을 예정입니다. 농기계도 인력을 최소화하는 형태로 갖출 예정입니다.

그러자면 뭐니 뭐니 해도 우리부부가 함께 건강해야만 합니다.
 “당신답지 않게 왜 그래? 나를 업고 있잖아, 지금. 그러면 됐지, 뭐.”
아내가 아내답지 않은 말을 하는군요. 맞는 말입니다. 저는 지금 아내를 업고 고추밭으로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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