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는 덤바우 뒷산에는 길이 많습니다. 좁은 길들이 켜켜이 먼 산 깊고 높은 곳까지 어수선하게 나 있습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짐승들이 낸, 얼핏 보아서는 길 같지도 않은 길들입니다.

비 내린 자리에 생긴 물길처럼 보이고 빗자루로 쓴 듯 지워졌거나 수북한 낙엽 때문에 뚝 끊기기도 합니다. 사람의 길과는 달리 꼭대기로만 치닫지 않고, 뱀 꼬리처럼 날렵하게 산을 벗어나는 법도 없는 길들입니다. 그들의 길은 삶의 긴 궤적이어서 끝내 그 품으로 접어들기 위해 맹렬히 산의 고샅을 누빕니다. 펑퍼짐한 능선을 가로타기도 하고, 깊은 계곡 커다란 바위를 넘어 어딘가에 있을 둥지를 향해 굽이굽이 가없습니다.

길은 우리 부부의 농장에도 있습니다. 온전히 우리 부부에게 맡겨진 길들입니다. 대개는 밭을 이리저리 둘러난 것들인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덤바우 옛 주인들이 밟아서 낸 길들입니다.

길가 밭두둑 턱을 받쳐놓은 어떤 돌들은 괴어 놓은 게 백 년은 족히 넘어 보입니다. 그 낮은 담을 따라 길은 산으로 향하거나 냇가로 이어집니다.

처음 덤바우에 왔을 당시, 가족들은 묵었던 밭이므로 이곳저곳 손을 대서 반듯하게 틀을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장차 지을 농사를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농사가 수월해진다는 데에는 우리 부부도 이견이 없었으나 망설였습니다.

“이런 모양을 갖추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을까?”
덤바우의 주인이 무수히 바뀌었을 텐데도 뚜렷한 오솔길을 보며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덤바우를 두고 함께 의논하지 않았으면서도 지금의 모양에 동의한 많은 옛 주인들의 지혜를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덤바우를 온새미로 이어가자고 결정했습니다.
짐승들에게도 자기만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짐승의 길과 나란할 수도 있겠으나 대개는 겹치고, 엇나가기 마련이겠습니다.

기다림으로, 서두름으로, 또는 슬그머니, 심지어는 살짝 자신의 길을 벗어나 길 위의 위험한 마주침을 피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길을 지켜냅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수한 만남과 부대낌으로 고달프고 지친다손 자신의 길을 지켜냅니다. 지키지 못 해 몸서리치는 이들조차도 자신의 길 위에서 그렇게 합니다.

길에 소유권이 있을 리 만무해서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길을 이용합니다. 공유하면서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활용하는 것들 중에 가장 보편적인 것이 길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도 앞길이 막막하고 사방이 적막하여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아내와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농사와 농업을 잇는 길이 엇나가 안개가 짙고, 때로는 길이 막힌 것처럼 보여 실의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있던 길이 무너진 것 같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밭 턱에 받쳐진 돌을 보며 옛 사람의 족적을 알게 되듯이 오래 전부터 닦인 무수한 길들을 되밟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면서도 타인의 궤적을 살피는 이들입니다.

어떤 이의 좁고 가파르고, 얽히고설킨 골목길의 막다른 길까지 외롭게 동행하였다가 자신의 길로 돌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 일을 끝없이 반복하여 길을 지났던 사람들의 자취를 지도로 그리고, 자신은 미지의 골목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와 아내는 덤바우에서 그런 이들의 체취를 느낍니다. 그저 아스라할 뿐인데도 가슴 한 귀퉁이에서는 확연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곁의 이웃이고, 자기 자신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 좋은데, 왜 늘 뒤에서 졸졸 따라다녀?”

밭이나 산에서 늘 아내의 뒤를 따르는 제가 성가시다는 아내의 말입니다.
“내가 앞장서면 이리가라, 저리가라 댁 잔소리가 심해서 그래.”
이랬더니 아내가 또 보기 좋게 받아치면서 깔깔 웃습니다.

 “길을 모르시는 거지, 호호.”
오늘은 느지막이 땅거미를 밟으며 뒷산이나 다녀와야겠습니다. 길을 잃더라도 앞장을 서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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