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결실의 계절입니다. 맑고 투명한 가을볕에 고개 숙인 황금빛 벼들이 아름답습니다. 다른 농사는 몰라도 나락농사는 거르는 법 없는 마을 농민들이 추수하느라 분주합니다. 일찌감치 내년 양파농사를 포기한 탓에 여느 해보다는 여유가 있다는 군요. 겨우내 양파 심던 밭을 비워두게 되어 바쁜 와중에도 서운한 기색이 엿보입니다.

규모가 꽤 되는 그들과는 결이 좀 다르긴 해도 덤바우부부 역시 결실의 계절을 피해가기 어렵습니다. 워낙 소농인데도 욕심은 사나워 마구잡이로 벌인 농사라 하루하루가 어수선합니다. 말수가 별로 많지 않는 아내가 떠버리, 가납사니가 되는 철입니다. 종류대로 거두다보면 해거름이 되고 마는데, 몸이 안 따라주니 부부지간에 입방아가 잦고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군요. 말이 좋아 다품종 소량생산이지 정리 안 한 고물상처럼 온갖 작물이 사방에 제멋대로 널려 있어 찾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어느 밭부터 정리할 것인지 갑론을박하던 끝에 일단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어머, 땅두릅 좀 봐봐.”
지난여름 줄기를 잘라내서 나눠 심어서 새싹들이 손바닥만 하게 돋아난 모습이 갈색으로 변해가는 주변 풍경에 퍽이나 대조적입니다. 봄처럼 싱그럽습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내가 제 손을 끌어 개울가로 데려가는 군요. “봐봐. 이게 흰수국이야. 많이 컸다. 꽃말이 너그럽고 상냥한 마음씨라네. 나 닮았지? 호호. 우리 저쪽에 용담도 보러갈까?” 아내가 종자 거둘 생각은 않고 바쁜 탓에 잊고 지내던 덤바우 식구들과 인사나누기에 푹 빠졌습니다.

“아니, 그런 건 나중에 봐도 되니까 저기, 잎들깨나 털자.”
그러자 아내는 소리 나게 혀를 차며 지청구합니다. 진작 밭을 갈아주지 않아 모종낸 들깨가 다 물러 버리지 않았느냐, 기껏 심어놓았더니 김매기 한번 도와주지 않아 보다시피 형편없다는 둥, 유난히 잎이 맛있다고 소문난 토종 들깨인데 맛도 못 봤다는 것이죠. 할 말이 없이 베어 놓은 들깨 대를 번쩍 들었더니 아까운 깨 땅바닥에 다 쏟아진다고 또 아우성입니다.

밭마다 조금씩 만들어 놓은 꽃밭에는 여전히 꽃들이 생생합니다. 흰 바탕에 붉은 점이 찍힌 꽃이 한 아름 다발로 핀 세이지가 유난히 예쁘군요. 허브라서 향도 진합니다. 다년생이라서 줄기를 잘라 덤불로 두툼히 덮어주기로 했습니다. 흔히 보는 코스모스, 채송화, 깨꽃, 봉숭아, 과꽃 등은 아내가 진작 씨를 받아두었다는 군요. “그러니까 미리미리 심을 자리 잘 마련해놔, 내년 봄에 말이야.” 사실 올 봄에 대대적으로 꽃을 심자고 했을 때, 아내는 반대했습니다. 작물 돌보기도 벅찬데, 무슨 시간이 있어 한가하게 꽃놀이냐고 따지기도 했습니다.

 막상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자 태도가 돌변한 아내는 덤바우를 꽃동산으로 만들자고 한술 더 뜨는 군요. 반가운 일입니다. 다양한 꽃들이 밭 주변에 있으면 벌레들 천적이 많아지거나 기피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과연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가지각색의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지더군요.

 “어머, 이거 봐!” 어조가 좀 다르군요. 제가 무슨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는 말투입니다. 아내가 사감선생의 자세를 취하며 가리키는 손끝을 보니 깡똥한 나무 한그루가 있군요. “뭔 나무지?”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해봅니다. 지난해 이른 과일 맛 좀 보자고 가져다 심은 유월도 복숭아나무 목이 날아갔습니다.

제가 예초기를 돌리다가 무람없이 목을 친 모양입니다. 조심성 없는 것은 둘째 치고, 어떻게 자신이 심은 나무도 몰라보는 무신경이 경악스럽다며 아내가 난리 났습니다. 수십 종이 넘는 토종, 고정종자를
하나하나 거두는 와중에 얼마나 많은 제 저지레가 적발될지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흐드러진 산국화 위로 구름 한 점 없이 청량한 가을 하늘이고서야 감출 도리도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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