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그려 앉아 보리와 밀을 번갈아 심느라 뻐근해진 허리를 펴려고 일어서다가 보았습니다. 앞산 속살이 훤히 보이는 군요. 어제만 해도 누런 이파리들이 촘촘했는데요. 지난 밤 잠시 흩뿌린 비바람에 나무들이 저렇게 이파리를 훌렁 벗었습니다. 굳이 ‘훌렁’이라는 표현을 쓰게 됩니다.

나무들이 홀가분해 보여 그렇습니다. 설마 이파리들이 나무의 버거운 짐이 된 적이 있었겠습니까마는, 사람인 제가 보기에 그렇군요. 일 년 내내 일하였던 잎들은 이제 낙엽이 되어 나무 발등에 기대 누워 편안한 휴식에 들고, 나무 또한 제 삶을 드높이느라 애쓰지 않아도 되는 철을 맞아 후련할 것 같습니다.

시나브로 한빈하게 변해가는 초겨울 풍경인데도, 제게는 산과 들이 비로소 풍요와 여유로움의 경지에 든 것처럼 보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곡기마저 끊은 면벽 수도승의 가부좌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부부가 시골로 옮겨가 살기로 결심하면서 감히 짐작하지 못했던 광경입니다. 막연히 더 많은 자연의 청량함을 만끽하게 되리라던 기대는 소심한 도시적 감수성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덤바우를 둘러싸고 철따라 다르게 벌어지는 풍경은 한마디로 웅숭깊었습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 처지라 사시사철의 묵직한 변화는 차라리 버겁다고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군요.

완두콩을 심던 아내가 어느 틈에 다가와 누구 네는 올해 샤인머스켓 포도농사로 벌이가 좋았다더라고 말합니다. 면벽한 수목들의 명상은 과연 어떠할까에 대해 궁구해볼 참이었는데 김이 샜다고 하자 아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명상이 아니라 손들고 앉아 반성해야 할 때 아닌가?”
아내는 이렇고 쏘아붙이고 다시 완두콩을 심으러 갑니다. 문득 앞산 비탈에서 냅다 굴러 떨어져 경제라는 돌부리에 이마를 찧은 기분이 듭니다. 아무려나 저 산의 나무들과 우리부부는 서로 무연할 뿐 함께 나눌 게 없는 걸까요?

 “그래도 사람들이 열광하는 작물이 간만에 하나쯤 생겼으니 좋은 거 아닌가?” 아내는 손가락 모양을 새부리처럼 만들어 완두콩을 흙에 꽂으며 제 말에는 대꾸도 없습니다. 덤바우에 들어온 첫해 겨울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시골에서 살게 되면 무척 적막하고 외로울 수 있겠다, 세상과 격절된 고립감에 약간은 서러울 수도 있겠다, 이도저도 아니더라도 심심하겠다고 예상했습니다. 이런 짐작은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우리부부의 경제활동이 농사로 바뀌자 오히려 부산하고, 수선스럽고, 시끄러운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세상을 등진다는 따위의 헛된 망상을 가졌던 탓에 마음의 소란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포도농가 분들 말이야. 우리 농사 늘 부럽다고 하시잖아.” 이번에도 아내는 대꾸가 없습니다. 초겨울 찬바람에 바람 든 무처럼 아내가 한빈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쌀쌀하네. 출출하기도 하고. 막걸리나 한잔할까?”
이렇게 비장의 무기랍시고 낮술로 아내를 유혹하자 새가 모이 쪼듯 완두콩을 넣으며 ‘남편이 당장 해야 할 일’을 콕콕 읊는 군요. 창고용 비닐하우스 기둥 재설치, 연동하우스 지을 터 밭갈이, 틀밭 지을 자리 일구기, 갈무리한 비닐하우스 거름주기, 온 밭에 유기물 덮어주기, 퇴비 만들 자리 터 닦기, 이른 봄꽃 씨앗 파종, 추위에 약한 여러해살이 꽃 옮겨심기, 농막 앞마당 대청소, 들쥐 피해가 우려되는 씨앗들 단단히 간수하기.

“그리고 관리기와 분무기 닦고, 조이고, 기름도 쳐. 알았지? 아참, 또 있다. 당신도 뜨거운 물로 박박 좀 씻어.”

그러고 보면 제 아내는 나무보다는 다년생 풀을 닮았습니다. 이 즈음 그런 풀들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아직은 얼지 않은 흙을 다부진 뿌리로 억세게 움켜 부르쥔 채 겨울을 노려보고 있거든요. 제가 일상과 습관에 공손하지 않고 엇나가기를 일삼는 얼치기입니다만, 강단만은 아내와 다르지 않습니다. 붙박이 농사꾼인 우리부부는 늘 외칩니다. 그게 겨울이든 고난이든 ‘올 테면 오라!’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