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에게서 부지런히 사는 법 배워”

  
 
  
 
양봉업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작은아버지의 양봉기술을 어깨너머로 보며 자랐다. 자연스럽게 벌과 친해졌다. 그의 작은아버지는 전북 지역 양봉업계에서는 유명세를 탔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양봉업계에 뛰어들려고 마음먹진 않았다. 작은 아버지가 제주도로 꿀을 채취하러 가는 길에 제주도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 따라 나섰던 길이 25년째 양봉업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또 처음부터 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아무래도 집안에서 양봉을 하고 있었으니까 남들보다 빨리 양봉을 배울 수 있었다.

벌을 키우면서 가장 고생스러웠던 일은?

지금까지 가장 고생스러웠던 일은 바로 배멀미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내가 어린시절에는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었다. 몇 달에 한 번씩 제주도에 꿀을 채취하러 갔다. 천상 벌통이 있으니까 배만 타야 했는데 제주도까지 가는 시간 10시 가까이 배멀미를 매우 심하게 했다. 그 일을 몇 년을 했는지 모른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차편도 좋아지고 지금은 제주도 보다는 거제도로 많이 가는 편이다.

벌을 키우면서 가장 즐거울 때는 언젠가?

벌의 부지런함은 어떤 생물을 막론하고 최고다. 벌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사람이 배우면 법없이도 살 것이다. 작은 벌이지만 배워야 한다. 늘 가슴속에 품고있는 생각이지만 벌같이 살면 성공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사람으로 치면 부모님한테 충성하고 윗사람들에 성실하다. 벌들은 규칙이 있다. 벌통에 벌의 숫자가 많으면 자기들끼리 왕을 만들고 어미가 나간다. 또 식량이 부족할 때는 왕을 보필하고 왕이 제일 마지막에 죽는다. 정 안되면 자기들 목숨을 걸고 도둑질을 하러 간다. 내 목숨을 걸고 왕과 내 가족을 지킨다. 그런것을 생각해보면 사람보다 오히려 나은 구석도 있다.

양봉업을 통한 소득과 규모는 얼마정도 인가?

소득은 다른 양봉 농가보다 조금 나은 1억에서 1억5천만원 정도다. 벌은 1천200통으로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해낸다. 25년을 거의 거르지 않고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하루에 할 일을 반나절에 해치운다. 그런 점이 입소문이 나면서 차츰 인정을 받고 있다.

양봉업도 점차 규모가 줄어들고 있는데?

양봉업은 최근 5년사이에 절반 가까이 규모가 줄어들었다. 우선 일부 사람들의 설탕꿀로 인해 소비자의 신뢰를 많이 잃었다. 또 양봉업을 이어나갈 차세대 주자들이 없다. 청우양봉원도 인턴사원을 채용해 후계 인력을 양성하려 했지만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은 동생과 함께 하고 있는데 다행히 형제가 하니까 혼자 할 때 보다 마음으로 든든하고 믿을 수 있어 좋다. 사람들이 양봉이 사양사업이니 말을 하는데 단순히 꿀만 채취해 파는 시대는 사양일지 모른다. 하지만 꿀과 벌에서 찾을 수 있는 소득원은 무한하다. 이런 것들을 동생과 연구해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앞으로 양봉산업이 발전하려면?

양봉은 모든 농업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벼도 벌이 수정을 시킨다. 양봉의 중요성을 안다면 산에 밀원수를 많이 심어야 한다. 꽃피는 나무를 심어야 한다. 양봉이 살아야 농업이 산다. 아직은 못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곡물값이 오르면 사탕수수 원당값이 오른다. 우리나라는 소에게 사료를 먹이듯이 꿀벌에는 어쩔 수 없이 설탕을 조금씩 먹인다. 그랬을 때 원당 가격이 오르면 양봉이 어렵다. 그래서 외화 낭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소비자 교육이 그래서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벌꿀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간단한 상식은?

일반가정에 벌꿀을 오래두고 먹었을 때 굳는 경우가 있다. 벌꿀이 굳는 것은 그 벌꿀이 포도당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럴때는 중탕으로 적당히 가열하면 그 맛과 향이 원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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