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온 여인… 시조 전통문화 맥 잇다

  
 
  
 
충남 부여의 ‘내포제 시조전수관’.
속칭 시조회관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김명선(31세, 규암면 오수리)씨는 ‘신동’이다.
내포제시조전수관의 김영숙 회장은 시조 창을 하고 있는 김씨를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내포제 시조 창은 오래된 우리의 소리이고 우리의 전통문화죠. 해외에서 살던 동포가 저렇게 우리 소리를 배우고 또 잘하는 걸 보니 정말로 대견하네요.”

아마 우리나라에 이런 문화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내포제 시조는 충남지역에 전수되어 온 한국의 독특한 무형문화재다. 충남뿐 아니라 각 지방에는 조금씩 특색 있는 그 지방만의 시조창법이 전해 온다.

김씨는 그 법통을 잇고 있는 셈이다. 젊다 못해 ‘어린’ 김명선씨의 학습속도는 참으로 놀라워서 이 지역에는 ‘시조신동’이 났다고 이미 소문이 ‘짜’하다. 한국의 전통음악은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런데 김씨는 어떻게 시조창을 배울 생각을 하게 됐을까?

“정말 우연히 시조회관에서 시조경창대회를 하는 걸 보게 됐어요. 처음 듣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까 굉장히 아련하면서 정감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들으면 들을수록,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깊이와 향기가 느껴지는 듯했어요. ‘아, 나도 한번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 온 전통문화가 배우기 쉬울 리 없었다. 김씨는 그저 듣는 것과 달리 부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내 실감하게 됐다.

“시조는 호흡이면 호흡, 박자면 박자, 발성이면 발성,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었어요. 배우면 배울수록 더욱 어려워지고,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운 경지가 또 가로막고….”


그녀에게 시조 하나를 배워서 완창하려면 보통 어느 정도 기간이 걸리는지 물었다.
‘태산이 높다하되’를 다 배우는 데 만 3년이 걸린다고들 해요. 그러니까 ‘태산이’ 이 세 글자를 배우는 데만 빨라도 3개월인 거죠. 보통 시조를 어느 정도 익히면 다른 국악 분야에도 저절로 조예가 생긴다고들 하시더군요. 결국 ‘소리’는 하나로 다 이어진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엔 수상경력이 너무 화려했다. 경창대회에서 그녀는 당당히 금상을 수상했다. ‘을부’는 평시조만을 부르는 부문이다. ‘갑부’도 있는데, 평시조와 사설시조 모두를 두루 불러야 한다.

말하자면 을부는 비교적 초보자가 도전하는 부문인 셈이고 갑부는 중급자가 도전하는 부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김씨가 겨우 6개월 남짓 시조 공부를 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취였다. 정말 ‘신동’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았다.

“낯선 결혼생활 힘들지만
참고 견뎌내야“ 후배 독려

남편 김씨는 전혀 그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훨씬 젊어 보였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는 그가 ‘귀고리’를 하고 있는 모습에 살짝 충격을 먹었다.
도무지 40대 후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내가 시조를 배우러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젊게 사는 남편의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김씨는 아내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말한다. “저야 늘 아내가 고맙고 미안하고 그렇죠. 꼭 아내에게 미안해서는 아니고 시조 배우고 취미 생활하는 문제는 제가 전혀 터치를 안 해요. 오히려 본인이 잘하니까 대견스럽죠. 얼마나 좋습니까. 한국 문화를 공부하고 스스로 재미를 느끼면서 사는 게.” 김씨 스스로가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즐기며 살 수 있게 되기까지 물론 쉽진 않았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대가족의 유일한 며느리로서의 삶이 왜 고달프지 않았겠는가. “집 근처에 종중산이 있어서 친척 분들도 자주 오시고, 제사도 굉장히 크게 했어요. 중국에 있을 때는 한국에서 제사를 이렇게까지 크게 하는지는 전혀 몰랐지요. 너무 힘들어서 유산도 한번 경험했고요….”

당시에는 벼농사도 크게 지었기 때문에 정말 하루도 쉴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도 중국 출신이라고 색안경 끼거나 하는 일 없이, 위로와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고.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사랑과 배려 덕분이었다.

그때의 고생이 지금의 작은 여유를 더욱 달콤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리라.
게다가 1년 전에는 중국에서 친정 부모님을 아예 모셔 와서 같은 부여에 살고 있다고 한다. 다른 농촌 여성 결혼이민자들이 정말 부러워할 만한 일이다.

“친정 부모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좋으시겠어요. 힘들게 중국까지 뵈러 가지 않아도 되고.”
“그렇죠. 정말 좋지요. 동생도 같이 왔는데, 식구들은 아직 귀화는 안 했어요. 이제 딸이랑 사위, 외손주가 있는 한국 땅에 정 붙이고 사셔야죠.”

그녀 가족의 사진촬영을 위해 세 아이를 데리러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갔다.
큰아들 봉중이는 7세로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고, 둘째딸 민정이는 6세, 막내딸 나금이는 5세이다. 아빠를 쏙 빼닮은 봉중이는 일곱 살인데도 탄탄하고 다부지다. 축구를 배우고 있다. 축구화를 신고 뛰어다는 걸 보니 자세가 딱 잡혔다. 딸들은 엄마를 닮아 참 예쁘다.

막내 나금이는 애교가 철철 흘러넘치고 둘째 민정이는 쑥스러움이 많았지만 영민해 보인다.
자녀를 더 가질 계획은 없으신지 물었더니 “셋이면 됐죠. 이젠 애들 건강하게 잘 키우는 게 목표예요!”라고 손사래를 치며 깔깔 웃는다. 세 아이의 엄마로, 대가족의 유일한 며느리로, 연배 차이 나는 남편의 아내로 살아오면서 김명선씨는 어느 새 나이답지 않은 ‘관록’을 갖춘 듯했다.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결혼이민 ‘선배’인 그녀에게 앞으로 오게 될 ‘후배’들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제가 충고를 해줄 주제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 생각엔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배려심 깊은 남편을 만나고, 잘해주는 시댁식구들과 살아도, 낯선 땅에서의 결혼생활은 그 자체로 굉장히 힘든 일이에요. 울기도 많이 울겠지요. 그래도 본인이 일단 결심하고 시작한 일이라면 참고 견뎌내야 하지 않을까요”
<농림부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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