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같은 삶으로 중국 현대화를 견인한 시대의 ‘경웅’

  
 
  
 
1907년 7월 15일
중국 소흥 헌정에서는 32세의 젊은 여인이 혁명의 뜨거운 피를 뿌리며 질풍노도와 같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이름은 추근(秋瑾; 1875~1907).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적당히 되바라진 조정의 관리(청나라 말기의 대다수 관리들이 이랬다.) 남편에게 시집가 적어도 궁핍한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젊은 주부가 비운의 혁명가로 생을 마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경웅(競雄)’ 또는 ‘감호여협(鑑湖女俠)’이라 불리던 그녀의 호가 그녀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경웅이란 불의에 털끝만치도 양보하지 않는 성격이란 뜻이다.

이혼녀 유학생

“저 애 아이까지 낳은 이혼녀래….전혀 몰랐어.”
“저렇게 앳된 얼굴이지만 낼 모레면 서른이래.”
“들어보니 남편은 청나라의 잘 나가는 관리라는데 왜 좋은 집안 박차고 나와 공부한다고 고생 하는지 모르겠어.”

1905년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靑山) 실천여학교에는 추근이라는 여학생이 화제가 됐다.
여자유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1남 1녀의 아이를 둔 이혼녀 유학생이라니….
추근은 예의 중국인들처럼 목소리도 컸고 특히 화가 나면 성질이 불같았다.

유학생들을 위한 부설 강습소 복도에서 일본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큰 소리로 낭독하는 추근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남들을 배려해 조용조용히 이야기하는 일본학생들에게 그녀는 이상하기도, 약간 무례하기도 해 보였다. 그러 때마다 추근은 이야기했다.

“너희는 너희나라말이니까 어렵지 않겠지만 내게는 너희가 영어를 어려워하듯이 똑같은 외국어야. 그러니까 너무 흉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남자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신여성의 삶을 살기위해서 나는 빨리 배워야 해.”
그녀는 한참 나이어린 동급생들에게 이야기했다.

“옛날에는 많은 문물을 일본이 중국에게서 배워갔지만 이제는 사정이 바뀐 것 같아. 지난 메이지유신 이후 50여 년 간 일본은 무섭게 발전했어. 명실 공히 아시아의 맹주라 할 만하지. 나는 너희 문물과 신학문을 배워 내 나라로 돌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거야.”
동급생중 한명이 말했다.

“언니. 작년에 ‘백화보’라는 잡지에서 언니가 기고한 글을 봤어요. ‘삼가 중국의 2억 여성동포에게 고함,, ‘우리 동포에게 경고함‘이라는 글이었지요?”
추근은 글에서 중국의 여성들도 교육을 받아야하고 특히 남성들의 성적 쾌락을 위해 고안한 중국의 대표적 악습 ‘전족’의 폐지를 주장했던 것이다.

“전족은 여자가 귀했던 옛날에 발을 작게 만들어 잘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뒤뚱뒤뚱 걷게 해서 질을 좁게 만들어 남자들의 쾌감을 좋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것이 맞아요?”
“얌전한 요시코가 그런 말을 다 할줄 아니? 나도 정확한 것은 몰라. 하지만 전족이야말로 가장 야만적인 악습중의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지.”

천방지축

추근은 1875년 중국 복건성의 제독 ‘추수남’의 딸로 하문(厦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단씨는 아름답고 정숙한 명문가 출신의 규수였다.
추근은 어머니와는 성격이 조금 달라 활달했으며 오빠들과 뛰어놀기를 좋아했다.

어린시절에는 말타기나 병정놀이를 좋아 해, 얌전한 규수로 자라주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애를 무던히도 태었던 말괄량이 소녀였다.
“저 아이 아무래도 빨리 전족을 시작해야겠소. 여자아이가 어떻게 저리 빠르지?…자기 오빠들이 따라잡지 못해 헉헉거리잖아. 키는 왜 그렇게 빨리 자라는지…”

아버지는 그날로 시녀들을 시켜 추근에게 전족을 위한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밤마다 몰래 풀어놓았다가 아버지가 볼 때는 전족을 차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머니는 추근의 이런 행동을 묵인해 주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 만큼은 풍부한 교양과 실력을 지닌 새로운 세상의 풍조에 맞는 신여성이 되길 바랐다.

어머니의 은밀한 배려로 추근은 시서와 경서는 물론이고 새로운 사조를 담은 유럽의 책들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다.
총명한 아이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검술과 승마에도 능했다. 추근은 자신도 모르게 전방위 팔방미인의 내공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는 한 짐 덩어리 딸, 천방지축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호남으로 전근가자마자 딸을 시집보내기로 했다.
매파를 넣어 낙점한 추근의 남편감은 ‘상담’지약의 부잣집 아들 ‘왕자방’이었다.

그때 나이 20세. 아내로서의 삶을 시작한 추근의 인생은 19세기말 중국 청나라의 일반적인 부잣집 부인들의 그것으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아들하나 딸 하나를 낳으며 조용히 지내고 있을 때까지는….

남편, 민중의 적

아이아빠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학문의 깊이도 추근에게 훨씬 못 미쳤다. 남편은 답답했고 일상은 무료했다. 추근이 두 아이를 돌보며 하루하루의 일상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뭐라고요? 벼슬을 돈 주고 샀다고요?”

어이가 없었다. 남편이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산 것이다.
매관매직(賣官賣職)은 탐관오리로 가는 길이다. 돈 주고 사는 벼슬은 또 다시 돈을 뜯어내는 권력으로 변질돼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다. 참을 수가 없었다.

일단 남편의 임지를 따라 북경으로 들어온 추근은 그때부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때는 어지러운 청나라말기. 만주족의 청나라는 이미 중국대륙을 다스릴 힘을 잃고 있었다.

이미 손문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왕실도 해체돼 궁궐 안에서 연금된 허수아비 황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 백 년의 뿌리 깊은 제국의 그늘은 곳곳에서 저항을 낳았고 지방에서 자리 잡은 토호들의 영향력도 아직은 막강했다.
세상이 흉흉할수록 한탕하려는 탐관오리들은 더 미쳐 날뛰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 아니던가.

“백성들은 한 끼 밥을 못 먹어 아이들을 굶기고 있는데, ‘호부주사’라는 하는 일도 없는 관리직을 돈으로 산 남편은 호의호식하며 백성들의 세금을 탕진했지. 저런 한심하고 무능한 관리가 이 나라에 수도 없이 기생하고 있겠구나…이런 생각을 하면 중국은 절망밖에 남은 것이 없었어. 더군다나 저런 한심한 관리가 내 남편이라니…” 추근은 유학생 시절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편은 한마디로 인민의 적이었지….”

병든 중국을 보다

추근은 북경에 와서 진짜 중국을 보게 됐다.
그녀가 북경에 오기 3 년 전(1900년) 발생한 ‘의화단 사건’은 일종의 외세배격운동이었다.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는 당시 북경에 있던 서구국가들의 공관을 포위하고 방화까지 했다.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헝가리 제국 등 8개국은 연합군을 이뤄 북경으로 쳐들어왔다.

중국은 아무소리 못하고 이들 제국에게 수도 북경을 내주게 된 것이다.
추근은 남의 나라 군대가 중국의 황도에 들어와 전횡하는 것을 보고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스릴 구역을 자기들 멋대로 나눠 북경을 마치 자기들 땅 인양 지배했다.

“피 끓는 중국의 젊은이들이라면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어” 추근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머 추부인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중국이 이렇게 약한 나라였나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잠을 못 이룬답니다.” 뜻밖에 남편 친구인 ‘영남호’의 아내 ‘오지영’이 추근에게 맞장구를 쳤다. “오부인도 저와 생각이 같군요. 저는 글씨만 잘 쓰시는 분인지 알았더니 뜻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습니다.”

추근과 오지영은 매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병든 중국을 한탄하고 무능한 조정의 관리들에게 비분강개했다.
“여자도 학문을 익혀 자립을 하지 않으면 안돼요. 세상을 바꾸기 위한 혁명은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일본에 가서 신학문을 배우겠다고 하겠어요. 이렇게 사는 것은 소나 말의 생활과 다름이 없지요.”(추근)
그러나 남편이 허락할리 만무. 수개월에 걸쳐 언성을 높였지만 애초에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추근은 알고 있었다.

“네 인생이 곤두박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느냐?”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추근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렇게 일본에 건너간 것이 1904년. 스물여덟의 중국인 이혼녀는 새로운 인생의 바다에 몸을 던졌다.

혁명의 불씨

일본은 추근에게 있어서 세계를 보는 창이었다.
“중국에서 듣던 일본은 저 멀리 좁은 섬나라의 왜소하고 미개한 집단들이 모여 사는 중국의 조공국이었어. 그러나 그들의 문물과 개화된 사상은 이미 유럽을 능가할 정도가 됐지.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때야.”
추근은 일본에서 뜻을 같이 하는 유학생들을 규합해 공애회, 십인회, 공문지천회 등의 모임을 만들거나 참석하며 혁명의 사상을 키워나갔다.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토론하고, 발표하고, 잡지에 글을 썼다.
“중국은 이제 봉건을 떨치고 일어서야 한다. 인민들은 왕조의 가혹한 수탈에서 벗어나야 하며, 중국은 외세의 흉흉한 침략에 맞서 싸워 진정한 자주를 이루어야 하고, 여성들은 수 천 년에 걸친 야만적 학대에서 해방되어야 해. 나는 이것을 이루기 위해 인생을 걸겠다.”

1905년 추근은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교단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20세기 초였고 장소는 여전히 봉건의 잔재가 남아있는 중국이었다.
“그 미친 여자를 당장 쫓아내시오.”

“저런 여자가 가르치는 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 없어요.”
학부모는 물론이고 학교 측도 당장에 발칵 뒤집혔다.

정부에서도 추근을 예의 감시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다시 도망치듯 일본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1907년)
“중국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여기 일본에서 중국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변화하는 중국을 만들어 나가자.”
추근은 ‘중국동맹회’의 창단에 적극적으로 나서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중국동맹회’는 일본에 유학 온 중국학생들이 중국의 근대화, 외세로부터의 완전한 자립, 백성의 자유와 평등, 여성해방 등을 위해 결성한 단체다.

그들은 인쇄물과 강연, 거리에서의 즉흥연설 등을 통해 자신들의 취지를 알려나갔다.
그들의 활동은 일본은 물론 본국 청나라의 조정에까지 알려지며 요주의 단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봉기전야

“추근 동지. 큰일 났어요. 일본 문부성에서 우리 단체의 해체를 명령해 왔어요. 어떠한 집회나 강연도 불허한대요.”
“무슨 일이야? 우리가 일본 정부에 잘 못한 일도 없는데.”

“중국 조정에서 협조를 요청했겠지요. 우리 뿐 아니라 중국유학생들의 모든 모임을 통제하는 ‘청국유학생집회규칙’을 만들어 감시하겠다는 거예요.”
“이런 비열한 놈들. 중국 조정도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더 얄밉군. 중국으로 가야겠다. 이제는 몸으로 싸워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1906년 중국으로 돌아 온 추근은 심계여학교로 들어가 장차 혁명의 아지트로 활용한다.
그녀는 수많은 중국의 여학생들에게 인간의 평등과 여성의 존엄, 여성성의 숭고함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중국여보’라는 잡지를 만들어 여성들을 계몽하고 중국의 자존심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중국여보는 결국 2차례의 간행에 머물고 말지만 이러한 시도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중국의 피 끓는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어. 또 봉건적인 만주족의 청 조정을 몰아내고 한족의 새로운 세상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단다. 그야말로 백성과 인민들의 세상이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해. 여성들이라고 일어서지 못하리란 법 있을까? 예로부터 기라성 같은 여걸들은 존재해 왔지.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 말에 올라타 전쟁터로 달려간 여장부들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겠지? 여자는 영웅이 될 수없다 말하지 말라…용천의 보검이 울고 있나니….”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남긴 추근은 학교를 박차고 나와 무장봉기에 뛰어들기로 했다.
피다 만 불꽃‘새로운 혁명의 세상을 위해 직접 총을 들고 싸운다….’
추근은 그동안 규합된 동지들과 작전을 짰다.

“우리는 호남의 유도일 부대가 일어나면 대통학당의 젊은이들과 함께 거기에 합류한다.
서석린 장군이 안휘성에서 봉기하면 남부가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절강성에서 기습적으로 정부군을 타격한다. 외국공관도 모두 불태우고 일거에 외세를 몰아낼 것이다.“
무장봉기의 날을 기다리며 추근과 그의 동지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1907년 6월말. 몹시 더웠다.

추근은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깼다. 왠지 불길한 기분이 온 몸을 휘감았다.
전령이 달려온 것은 그때였다.
“추근 대장…..서석린 동지가….그만… 피살됐답니다. 이미 서석린 부대 전체가 괴멸돼 안휘성 봉기는 어려워졌답니다.”

업 친 데 덮쳐 내부밀고자가 정부군을 끌고 쳐들어왔다.
그녀는 아무런 뜻도 펼치지 못한 채 그렇게 ‘대역죄인’으로 청 조정에 잡혀갔다.
무려 20일 가까이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가련한 몸은 그해 7월 15일 칼날을 목으로 받아내야 했다.
“가을바람 가을비로 수심에 잠긴다.” 그녀의 마지막 육성이었다.
추근은 32세의 나이에 절명했으나 중국근현대사의 열혈여성혁명가로 족적을 남겼다.

그녀가 끼친 물리적 영향력은 미미했으나 그녀의 정신과 사상은 중국의 현대화과정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국공산당의 여성평등이념에 끼친 그녀의 역할은 실로 지대한 것이다. 추근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분사한 중국의 ‘유관순’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사상에서 다만 아쉬운 점은 지나친 한족(漢族)위주의 민족편향이라 할 수 있겠다.“여자는 영웅이 될 수없다” 말하지 말라며 무장봉기 추근(秋瑾)

불꽃같은 삶으로 중국 현대화를 견인한 시대의 ‘경웅’


1907년 7월 15일
중국 소흥 헌정에서는 32세의 젊은 여인이 혁명의 뜨거운 피를 뿌리며 질풍노도와 같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이름은 추근(秋瑾; 1875~1907).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적당히 되바라진 조정의 관리(청나라 말기의 대다수 관리들이 이랬다.) 남편에게 시집가 적어도 궁핍한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젊은 주부가 비운의 혁명가로 생을 마감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경웅(競雄)’ 또는 ‘감호여협(鑑湖女俠)’이라 불리던 그녀의 호가 그녀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경웅이란 불의에 털끝만치도 양보하지 않는 성격이란 뜻이다.

이혼녀 유학생

“저 애 아이까지 낳은 이혼녀래….전혀 몰랐어.”
“저렇게 앳된 얼굴이지만 낼 모레면 서른이래.”
“들어보니 남편은 청나라의 잘 나가는 관리라는데 왜 좋은 집안 박차고 나와 공부한다고 고생 하는지 모르겠어.”

1905년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靑山) 실천여학교에는 추근이라는 여학생이 화제가 됐다.
여자유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더군다나 1남 1녀의 아이를 둔 이혼녀 유학생이라니….
추근은 예의 중국인들처럼 목소리도 컸고 특히 화가 나면 성질이 불같았다.

유학생들을 위한 부설 강습소 복도에서 일본어를 빨리 익히기 위해 큰 소리로 낭독하는 추근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하루 종일 울려 퍼졌다.
남들을 배려해 조용조용히 이야기하는 일본학생들에게 그녀는 이상하기도, 약간 무례하기도 해 보였다. 그러 때마다 추근은 이야기했다.

“너희는 너희나라말이니까 어렵지 않겠지만 내게는 너희가 영어를 어려워하듯이 똑같은 외국어야. 그러니까 너무 흉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남자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신여성의 삶을 살기위해서 나는 빨리 배워야 해.”
그녀는 한참 나이어린 동급생들에게 이야기했다.

“옛날에는 많은 문물을 일본이 중국에게서 배워갔지만 이제는 사정이 바뀐 것 같아. 지난 메이지유신 이후 50여 년 간 일본은 무섭게 발전했어. 명실 공히 아시아의 맹주라 할 만하지. 나는 너희 문물과 신학문을 배워 내 나라로 돌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일조할거야.”
동급생중 한명이 말했다.

“언니. 작년에 ‘백화보’라는 잡지에서 언니가 기고한 글을 봤어요. ‘삼가 중국의 2억 여성동포에게 고함,, ‘우리 동포에게 경고함‘이라는 글이었지요?”
추근은 글에서 중국의 여성들도 교육을 받아야하고 특히 남성들의 성적 쾌락을 위해 고안한 중국의 대표적 악습 ‘전족’의 폐지를 주장했던 것이다.

“전족은 여자가 귀했던 옛날에 발을 작게 만들어 잘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뒤뚱뒤뚱 걷게 해서 질을 좁게 만들어 남자들의 쾌감을 좋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느 것이 맞아요?”
“얌전한 요시코가 그런 말을 다 할줄 아니? 나도 정확한 것은 몰라. 하지만 전족이야말로 가장 야만적인 악습중의 하나라는 것은 분명하지.”

천방지축

추근은 1875년 중국 복건성의 제독 ‘추수남’의 딸로 하문(厦門)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단씨는 아름답고 정숙한 명문가 출신의 규수였다.
추근은 어머니와는 성격이 조금 달라 활달했으며 오빠들과 뛰어놀기를 좋아했다.

어린시절에는 말타기나 병정놀이를 좋아 해, 얌전한 규수로 자라주기를 바랬던 아버지의 애를 무던히도 태었던 말괄량이 소녀였다.
“저 아이 아무래도 빨리 전족을 시작해야겠소. 여자아이가 어떻게 저리 빠르지?…자기 오빠들이 따라잡지 못해 헉헉거리잖아. 키는 왜 그렇게 빨리 자라는지…”

아버지는 그날로 시녀들을 시켜 추근에게 전족을 위한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밤마다 몰래 풀어놓았다가 아버지가 볼 때는 전족을 차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머니는 추근의 이런 행동을 묵인해 주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 만큼은 풍부한 교양과 실력을 지닌 새로운 세상의 풍조에 맞는 신여성이 되길 바랐다.

어머니의 은밀한 배려로 추근은 시서와 경서는 물론이고 새로운 사조를 담은 유럽의 책들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었다.
총명한 아이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검술과 승마에도 능했다. 추근은 자신도 모르게 전방위 팔방미인의 내공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눈에는 한 짐 덩어리 딸, 천방지축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호남으로 전근가자마자 딸을 시집보내기로 했다.
매파를 넣어 낙점한 추근의 남편감은 ‘상담’지약의 부잣집 아들 ‘왕자방’이었다.

그때 나이 20세. 아내로서의 삶을 시작한 추근의 인생은 19세기말 중국 청나라의 일반적인 부잣집 부인들의 그것으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아들하나 딸 하나를 낳으며 조용히 지내고 있을 때까지는….

남편, 민중의 적

아이아빠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학문의 깊이도 추근에게 훨씬 못 미쳤다. 남편은 답답했고 일상은 무료했다. 추근이 두 아이를 돌보며 하루하루의 일상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뭐라고요? 벼슬을 돈 주고 샀다고요?”

어이가 없었다. 남편이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산 것이다.
매관매직(賣官賣職)은 탐관오리로 가는 길이다. 돈 주고 사는 벼슬은 또 다시 돈을 뜯어내는 권력으로 변질돼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다. 참을 수가 없었다.

일단 남편의 임지를 따라 북경으로 들어온 추근은 그때부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때는 어지러운 청나라말기. 만주족의 청나라는 이미 중국대륙을 다스릴 힘을 잃고 있었다.

이미 손문의 국민당 정부에 의해 왕실도 해체돼 궁궐 안에서 연금된 허수아비 황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 백 년의 뿌리 깊은 제국의 그늘은 곳곳에서 저항을 낳았고 지방에서 자리 잡은 토호들의 영향력도 아직은 막강했다.
세상이 흉흉할수록 한탕하려는 탐관오리들은 더 미쳐 날뛰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 아니던가.

“백성들은 한 끼 밥을 못 먹어 아이들을 굶기고 있는데, ‘호부주사’라는 하는 일도 없는 관리직을 돈으로 산 남편은 호의호식하며 백성들의 세금을 탕진했지. 저런 한심하고 무능한 관리가 이 나라에 수도 없이 기생하고 있겠구나…이런 생각을 하면 중국은 절망밖에 남은 것이 없었어. 더군다나 저런 한심한 관리가 내 남편이라니…” 추근은 유학생 시절 친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남편은 한마디로 인민의 적이었지….”

병든 중국을 보다

추근은 북경에 와서 진짜 중국을 보게 됐다.
그녀가 북경에 오기 3 년 전(1900년) 발생한 ‘의화단 사건’은 일종의 외세배격운동이었다.
의화단이라는 비밀결사는 당시 북경에 있던 서구국가들의 공관을 포위하고 방화까지 했다.
미국, 영국, 일본, 독일, 헝가리 제국 등 8개국은 연합군을 이뤄 북경으로 쳐들어왔다.

중국은 아무소리 못하고 이들 제국에게 수도 북경을 내주게 된 것이다.
추근은 남의 나라 군대가 중국의 황도에 들어와 전횡하는 것을 보고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다스릴 구역을 자기들 멋대로 나눠 북경을 마치 자기들 땅 인양 지배했다.

“피 끓는 중국의 젊은이들이라면 이렇게 당할 수만은 없어” 추근은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머 추부인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중국이 이렇게 약한 나라였나를 생각하면 분통이 터져 잠을 못 이룬답니다.” 뜻밖에 남편 친구인 ‘영남호’의 아내 ‘오지영’이 추근에게 맞장구를 쳤다. “오부인도 저와 생각이 같군요. 저는 글씨만 잘 쓰시는 분인지 알았더니 뜻이 그렇게 깊은 줄 몰랐습니다.”

추근과 오지영은 매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병든 중국을 한탄하고 무능한 조정의 관리들에게 비분강개했다.
“여자도 학문을 익혀 자립을 하지 않으면 안돼요. 세상을 바꾸기 위한 혁명은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남편에게 일본에 가서 신학문을 배우겠다고 하겠어요. 이렇게 사는 것은 소나 말의 생활과 다름이 없지요.”(추근)
그러나 남편이 허락할리 만무. 수개월에 걸쳐 언성을 높였지만 애초에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추근은 알고 있었다.

“네 인생이 곤두박질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느냐?”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추근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렇게 일본에 건너간 것이 1904년. 스물여덟의 중국인 이혼녀는 새로운 인생의 바다에 몸을 던졌다.

혁명의 불씨

일본은 추근에게 있어서 세계를 보는 창이었다.
“중국에서 듣던 일본은 저 멀리 좁은 섬나라의 왜소하고 미개한 집단들이 모여 사는 중국의 조공국이었어. 그러나 그들의 문물과 개화된 사상은 이미 유럽을 능가할 정도가 됐지.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때야.”
추근은 일본에서 뜻을 같이 하는 유학생들을 규합해 공애회, 십인회, 공문지천회 등의 모임을 만들거나 참석하며 혁명의 사상을 키워나갔다.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토론하고, 발표하고, 잡지에 글을 썼다.
“중국은 이제 봉건을 떨치고 일어서야 한다. 인민들은 왕조의 가혹한 수탈에서 벗어나야 하며, 중국은 외세의 흉흉한 침략에 맞서 싸워 진정한 자주를 이루어야 하고, 여성들은 수 천 년에 걸친 야만적 학대에서 해방되어야 해. 나는 이것을 이루기 위해 인생을 걸겠다.”

1905년 추근은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교단에 서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20세기 초였고 장소는 여전히 봉건의 잔재가 남아있는 중국이었다.
“그 미친 여자를 당장 쫓아내시오.”

“저런 여자가 가르치는 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 없어요.”
학부모는 물론이고 학교 측도 당장에 발칵 뒤집혔다.

정부에서도 추근을 예의 감시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다시 도망치듯 일본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었다.(1907년)
“중국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여기 일본에서 중국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변화하는 중국을 만들어 나가자.”
추근은 ‘중국동맹회’의 창단에 적극적으로 나서 핵심인물로 부상했다.
‘중국동맹회’는 일본에 유학 온 중국학생들이 중국의 근대화, 외세로부터의 완전한 자립, 백성의 자유와 평등, 여성해방 등을 위해 결성한 단체다.

그들은 인쇄물과 강연, 거리에서의 즉흥연설 등을 통해 자신들의 취지를 알려나갔다.
그들의 활동은 일본은 물론 본국 청나라의 조정에까지 알려지며 요주의 단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봉기전야

“추근 동지. 큰일 났어요. 일본 문부성에서 우리 단체의 해체를 명령해 왔어요. 어떠한 집회나 강연도 불허한대요.”
“무슨 일이야? 우리가 일본 정부에 잘 못한 일도 없는데.”

“중국 조정에서 협조를 요청했겠지요. 우리 뿐 아니라 중국유학생들의 모든 모임을 통제하는 ‘청국유학생집회규칙’을 만들어 감시하겠다는 거예요.”
“이런 비열한 놈들. 중국 조정도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더 얄밉군. 중국으로 가야겠다. 이제는 몸으로 싸워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1906년 중국으로 돌아 온 추근은 심계여학교로 들어가 장차 혁명의 아지트로 활용한다.
그녀는 수많은 중국의 여학생들에게 인간의 평등과 여성의 존엄, 여성성의 숭고함을 가르쳤다. 1907년에는 ‘중국여보’라는 잡지를 만들어 여성들을 계몽하고 중국의 자존심을 되찾자고 호소했다.
중국여보는 결국 2차례의 간행에 머물고 말지만 이러한 시도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 중국의 피 끓는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어. 또 봉건적인 만주족의 청 조정을 몰아내고 한족의 새로운 세상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단다. 그야말로 백성과 인민들의 세상이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해. 여성들이라고 일어서지 못하리란 법 있을까? 예로부터 기라성 같은 여걸들은 존재해 왔지. 갑옷을 입고 칼을 들고 말에 올라타 전쟁터로 달려간 여장부들의 이야기를 익히 들어왔겠지? 여자는 영웅이 될 수없다 말하지 말라…용천의 보검이 울고 있나니….”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를 남긴 추근은 학교를 박차고 나와 무장봉기에 뛰어들기로 했다.
피다 만 불꽃‘새로운 혁명의 세상을 위해 직접 총을 들고 싸운다….’
추근은 그동안 규합된 동지들과 작전을 짰다.

“우리는 호남의 유도일 부대가 일어나면 대통학당의 젊은이들과 함께 거기에 합류한다.
서석린 장군이 안휘성에서 봉기하면 남부가 대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절강성에서 기습적으로 정부군을 타격한다. 외국공관도 모두 불태우고 일거에 외세를 몰아낼 것이다.“
무장봉기의 날을 기다리며 추근과 그의 동지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1907년 6월말. 몹시 더웠다.

추근은 악몽에 시달리다 잠에서 깼다. 왠지 불길한 기분이 온 몸을 휘감았다.
전령이 달려온 것은 그때였다.
“추근 대장…..서석린 동지가….그만… 피살됐답니다. 이미 서석린 부대 전체가 괴멸돼 안휘성 봉기는 어려워졌답니다.”

업 친 데 덮쳐 내부밀고자가 정부군을 끌고 쳐들어왔다.
그녀는 아무런 뜻도 펼치지 못한 채 그렇게 ‘대역죄인’으로 청 조정에 잡혀갔다.
무려 20일 가까이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가련한 몸은 그해 7월 15일 칼날을 목으로 받아내야 했다.
“가을바람 가을비로 수심에 잠긴다.” 그녀의 마지막 육성이었다.
추근은 32세의 나이에 절명했으나 중국근현대사의 열혈여성혁명가로 족적을 남겼다.

그녀가 끼친 물리적 영향력은 미미했으나 그녀의 정신과 사상은 중국의 현대화과정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중국공산당의 여성평등이념에 끼친 그녀의 역할은 실로 지대한 것이다. 추근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분사한 중국의 ‘유관순’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사상에서 다만 아쉬운 점은 지나친 한족(漢族)위주의 민족편향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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