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는 천하에 동등하다. 오직 그 역할이 다른 뿐…”

  
 
  
 
윤지당 임씨의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1721년(경종 원년)에 함흥판관을 지낸 노은(老隱) 임적(任適, 1685-1728)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성리학자로 이름을 날린 녹문(鹿門) 임성주(任聖周)가 그녀의 오빠이고, 운호(雲湖) 임정주(任靖周)가 남동생이다.

윤지당은 아버지가 경기도 안성의 양성에서 현감을 할 때 태어났으며, 여기서 5살까지 컸고, 이후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함흥에 갔다가 2년 후 한양으로 돌아와 살았다.

8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청주로 이사해 17세 때까지 살다가 경기도 여주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오빠 임성주가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했지만 집안 살림은 그리 넉넉지 못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효경, 열녀전, 소학, 사서(四書) 등의 유교 경전과 사서(史書) 등을 열독했던 소녀천재 윤지당은 효심과 형제애가 가득했고 부녀자로서의 교양과 살림공부도 열심히 했다.

19세에 시집가기 전, 청주와 여주에서의 보냈던 소녀시절 10여 년은 ‘정진(精進)의 시기’로 그녀의 학문적 소양은 이때 거의 기초를 잡았다.
임성주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여동생에게 학문적 지원을 결심하게 된다.

차라리 네가 대장부였다면…
임성주는 동생 임정주(막내)의 교육에 엄했다.
제법 터울이 지는 어린 동생을 훌륭한 사대부로 키우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책상머리에 마주 앉아 종일 경전을 읽고 해석하게 했다. 공부하기 싫어 몸을 배배트는 임정주를 회초리로 다스리기 일쑤였고, 금방 가르친 것을 못 알아들을 때는 책상을 탕탕 치며 호통 치기도 했다.

“공자께서는 군자의 강함을 뭐라고 설파하였더냐? 한 번 이야기 해 보아라.”
“저… 그게… 그것이….”
“이 녀석아 바로 어제 배운 것 아니더냐? 잘 생각해 봐.”

이 때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던 윤지당이 말한다.
“군자는 화하면서도 흐르지 아니하니 강하도다! 그 꿋꿋함이여, 중(中)에서 기울어지지 아니하니 강하도다! 그 꿋꿋함이여…라고 칭송하였습니다.”

임성주는 정주에게 한 번 눈을 부라리고는 윤지당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누가 네깟 년한테 물었더냐? 아녀자의 도리가 있고 사내는 사내의 도리가 있다. 학문은 사내의 것인데 어찌 네가 이 자리에 끼어드느냐?”

윤지당은 조용히 부엌으로 자리를 피했다.
임성주는 여동생에 새삼 놀라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아 동생아 차라리 네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그랬다면 너야말로 조선을 빛 낼 대유학자로 클 수 있었을 텐데… 천지신명은 어찌하여 너를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셨던가?”

여동생의 총명과 슬기, 학문에 대한 탐구열, 놀라운 학습 성취도는 어린 시절부터 오빠 임성주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그 자부심은 동생이 여자라는 현실을 생각할 때마다 슬픔으로 메아리 쳐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 이후 오빠는 여동생의 공부를 묵인했다.

낭중지추(주머니 속의 송곳)
윤지당은 19살 되던 해인 1739년 강원도 원주의 선비 신광유와 혼인했다. 그러나 결혼 8년만(27세 때)에 남편을 잃고 그만 청상과부 신세가 됐다.
윤지당은 매사에 야무진 일처리에 살림솜씨도 능숙해 집안 대소사에 그녀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몰래 공부를 하면서도 살림에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다.

시동생 ‘신광무’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도 모두 윤지당을 좋아했다. 특히 신광무는 훗날 “나는 우리 형수님을 마음 속 깊이 존경했노라”고 털어 놨을 만큼 윤지당에 대해 남 다른 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신광무 등 시댁식구들은 윤지당을 의심한 적이 있었다. 윤지당은 남편의 사후 몸종을 통해 집 바깥과 자주 서신을 교환했다. 신광무는 어는 날 몸종을 시켜 윤지당이 보관하고 있는 서신을 가져와 보라고 시켰다.

그런데 그 편지는 당시 아녀자들이 서신을 주고받는 ‘언문(한글) 편지’가 아니었다. 세련된 문장에 수준 높은 서체는 분명 사대부의 편지였다. 신광무는 ‘혹시 형수가 바깥 남자와…’라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형수를 추궁할 수는 없는 일이라 몸종을 불러 쥐 잡듯이 다그쳤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글은 윤지당의 것이고 서신을 주고받는 사람은 친정집 오빠라는 것이었다.

글을 읽어 본 신광무는 눈이 확 떠졌다. “이럴 수가….” 형수는 천재였다. 웬만한 학자를 능가하는 깊은 학문적 성취와 경전을 자기 것으로 해석하며 독자적 철학을 구축하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부녀자로서 시댁 식구들에게 드러내지 않게 행동했지만 탁월한 재능은 언젠가는 알려지게 마련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더니….” 신광무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여자는 소중하다”
윤지당은 평생을 통해 “인간으로서 남녀는 동등하고 원래의 성(性)을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씩씩한 것은 남자의 원리고, 유순한 것은 여자의 원리이니 이처럼 각기 그 법칙이 있는 법이다. 태사(주나라 문왕의 부인이며 무왕의 어머니)와 문왕의 업적이 서로 달랐던 것은 서로 그 역할과 분수가 달랐기 때문이다.

다 같이 천성대로 최선을 다하였던 것은 그 원리가 같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꾸어 놓아 둘이 남녀가 바뀌어 태어났다고 하면, 두 분이 또 그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인으로 태어나서 태임(고대 중국에서 성인으로 간주되는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과 태사의 도덕실천을 자임(自任)하지 않으면 이는 자포자기한 사람이다>

‘윤지당유고’에 나오는 이 구절은 그녀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윤지당은 남녀로 태어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각각 그 생김새와 에너지, 능력에 따라 성별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남녀 자체의 존비(尊卑)나 미추(美醜)는 따질 일이 아니라고 했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하고, 일종의 결격체(缺格體)라 여겼던 당시 세상에서 “여자도 하나의 완성된 인격”이라며 “여자는 소중하다”고 외치고 싶었던 임윤지당.

동생과 시동생이 유고집 남겨
윤지당은 남편과 8년 간 결혼생활을 했으나 후손은 두지 못했다. 시동생 신광무는 자신의 아들을 ‘재준’을 양자로 보냈다.

73세까지 사는 동안 윤지당의 중년 이후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왕성한 학구열은 평생 동안 수많은 논문과 경전해석, 평론, 발문, 논설, 잠언(箴言), 찬문(贊文), 제문(祭文) 등을 남겼다.
1796년(정조 20년) 신광무는 책과 문서들을 잔뜩 가지고는 윤지당의 동생 임정주를 찾았다.

“형수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내 오늘 사돈을 뵈러온 것은 이 문서의 출처를 좀 알아보려고 온 것입니다. 형수님 가신 후 제가 보관해 오던 것입니다. 이 중에는 형수님이 쓰신 글도 있고 남의 글도 있을 것이고 해서 그것을 가려내야겠기에 도움을 좀 청하려고 합니다.”

“잘 오셨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누님께 글을 배우다시피 했기에 누님의 글씨는 누구보다도 잘 구분합니다.”
이 두 사돈은 수개월에 걸쳐 윤지당의 글을 가려내서는 그것을 문집으로 간행하기로 했다. ‘윤지당유고’는 그렇게 탄생했다. 윤지당의 철학은 그녀를 존경했고 그녀의 재능을 흠모했던 남동생과 시동생의 노력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임윤지당은 주로 규방문학이나 시(詩)를 남긴 조선시대의 여류 문사들, 즉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매창 등과도 다르고 백과사전격인 ‘규합총서’를 남긴 빙허각 이씨와도 다르다. 그녀는 다른 여성들과는 달리 당당히 ‘성리학’이라는 주류학문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임윤지당은 우리나라 근대화 이전에 거의 유일무이했던 ‘여성학자’였다. 그러나 그녀가 바랐던 ‘여성의 존엄이 인정받는 세상’은 그 후에도 150년이 더 지나야 싹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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