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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든 여인(Lady of the Lamp)’, 광명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피투성이 전장에 핀 인류애의 꽃
2008년 06월 04일 (수) 13:21:03 박재호 pjaehool@nongupin.co.kr
  
 
  
 
야속한 파도
세찬 파도가 연신 뱃머리를 때리고 있다. 배는 몹시도 출렁인다.
선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이팅게일은 아까부터 갑판위에 나와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착잡했다.

왜 이렇게 천천히 가는 것일까…조바심에 견딜 수 없는 심정이었다.
차라리 그 보고서를 보지 않았더라면 마음만은 편했으련만…

조국(영국)의 군인들이 저 멀리 타향 터키에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거나 다쳐도 제대로 수습되지도, 치료 받지도 못한 채 끔찍한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은 나이팅게일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때는 1854년 가을이었다.

약 한달 전 런던에서 주로 귀족가족들이 다니는 병원의 간호장으로 근무하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우연히 크림전쟁(1853~1856)에 참전한 영국군들의 비참한 위생상태에 대한 신문기사를 접하게 된다.

영국군은 프랑스군과 연합해 그해 9월부터 전쟁에 참전했는데 전쟁 중 병에 걸리거나 부상을 당해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안 죽어도 될 사람들까지 멀쩡한 목숨을 내버리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크림전쟁은 동남부유럽의 크림반도 일대의 패권을 두고 러시아와 영국?프랑스?오스만제국(터키) 연합군이 일전을 겨룬 참혹한 전쟁으로 3년간 25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보고서에 영국국민들이 들끓었다.

“프랑스에서는 자원봉사 수녀님들이 전쟁터로 건너가 다친 병사들을 돌보고 있대.”
“우리 병사들이 치료받는 곳은 이와 벼룩이 들끓고 쥐똥으로 뒤덮여있대. 거기다 간호 인력이 부족해 치료도 못 받고 있어서 작은 부상으로 들어왔다가도 감염으로 죽어나간다는 거야.”
“도대체 대영제국 체면에 이게 무슨 일이냔 말이야.”

나이팅게일은 전장으로 가겠다는 기특한 후배간호사들 3명과 함께 가방을 꾸리고 있었다.
이때 오랜 친구로 지내던 ‘시드니 허버트’로부터 전갈이 왔다.
그는 당시 영국 전쟁장관에 재직 중이었다.

‘간호사 몇 명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듯싶소. 그 정도 인원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사명감에 불타는 대규모 간호단의 파견이오.’

나이팅게일 38명으로 이루어진 간호단을 부랴부랴 만들었고 어렵사리 터키의 스쿠타리 행 여객선에 올랐다.
나이팅게일의 마음속에는 지금도 치료의 손길을 기다리다 안타까운 숨을 놓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배의 진행을 더디게 하는 저 높다란 파도가 야속했다.

‘아~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 할 텐데…’

아수라장
비명과 역겨운 냄새로 가득한 야전병원에 도착한 것은 출발 후 15일이 지난 그해 11월 5일.
간호단은 열악한 환경 외에도 자신들을 마치 부정한 존재처럼 여기는 남자 의사들의 불쾌한 시선에 당혹했다.
“우리들은 선생님들의 일손을 덜어드리고, 부상에 신음하는 환자들을 쾌적하게 돌보아 드리려고 여기에 온 것입니다.”(나이팅게일)

“뭐요? 쾌적하게 돌보아줘요? 이봐요 저 들끓는 쥐들 보이지요? 저기 저 환자는 살이 썩어가고 있는데도 약품이 부족해 손을 놓고 있다오. 환자가 하루에 물 1리터도 쓸 수 없는 이곳에서 당신들이 무얼 도와준단 말이요.”

나이팅게일은 그러나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면 저 의사처럼 신경이 날카로워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잔뜩 볼메어 있는 간호사들을 다독였다.

그녀는 간호단을 불러 모아 이야기했다.“여기에 온 우리도 전쟁하러 온 것입니다. 아무리 환자들이 짜증을 내도, 의사들이 무시해도 우리는 참아내야 합니다. 아무리 고생스럽다 해도 실제 전쟁터에서 총탄 속을 누비며 싸우는 병사들의 노고에는 비할 바 안 되겠지요. 여러분 사명감을 가지고 일합시다.”
숨을 돌리기도 전에 도착한 바로 그날 밤부터 부상병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오늘 인키르만 전투가 무척이나 치열했던 모양입니다. 이곳 말고도 크림 지역 야전병원에도 수 천 명이 실려 갔다고 해요. 병동이 꽉 찬지 오래인데…이거 정말 큰일이군.”
부상병들이 끝도 없이, 끝도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병원 복도는 물론 바깥에까지 마른 풀을 깔고 누워있는 환자들은 고통 속에 방치돼 있다.
‘침대, 옷, 의료기구, 장비 모든 것이 부족해. 영국으로부터 지원이 오려면 보름을 더 기다려야 해. 그동안 이라면 이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거야.’
나이팅게일은 난감했다.

어린 간호사 몇 명이 부상병들이 흘린 인분과 오물 냄새에 코를 막고 웩웩거리고 있었다.
고열에 시달리며 헛소리를 질러대는 환자들은 곳 숨이 넘어갈 듯하다.

‘이것이 전쟁의 참상이구나. 우리 영국은 세계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많은 군사를 파견했다. 그동안 이룬 우리의 전과(戰果)를 ’위대한 조국의 영광‘으로만 생각했던 것은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가. 우리 정치인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우리 군인들의 무력에 의해 식민지 나라의 국민들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을까?’

나이팅게일은 자국 병사들의 아픔 속에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 고통 받는 인류의 보편적인 아픔을 바라보았다.

‘영국 병사들처럼 러시아 병사들도 똑 같은 아픔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나이팅게일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때… “으아악~ 차라리 나 좀 죽여주시오.”

고통에 겨운 한 어린 병사가 나이팅게일의 옷자락을 잡고 절규했다.
‘아~ 얼마나 힘들면 이럴까? 이 사병을 위해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니…’ 이 가련한 환자를 치료할 약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이팅게일은 병사가 혼절한 후에야 그 가련한 병사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이 매일 같이 이어졌다.
하루하루가 기나긴 여정처럼 느껴졌다.

또 하나의 전쟁
나이팅게일은 일단 야전병원의 청결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힘든 가운데서도 환자들의 더러운 옷을 병원 외부에서 깨끗이 세탁해 왔다.

엄청난 양의 세탁물을 처리하는 것 만해도 중노동에 가까운 일이었다.
또한 그녀는 환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본국에서 가족으로부터 오는 편지나 전보가 부상자들에게 차질 없이 전달되도록 전담 간호사를 임명했다.

의약품의 재고?수요예측, 조달, 보관 등 체계적인 관리시스템 구축에도 골몰했고, 의사들과 의견을 나눴다.
간호단의 책임자로서 정부에 올려야 하는 각종 보고서와 평가서 등 행정적인 부분도 업무를 가중시켰다.
일부 간호사들이 나이팅게일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아주 일을 만들어요. 만들어.”

“환자들 보는 것만도 숨도 못 쉴 정도로 바쁜 사람한테 무슨 편지, 전보전달 업무까지 맡기는 거야. 우리가 철인이냔 말이다.”

일부 간호사들은 신경이 날카로운 부상병들과 다투거나, 전에는 보지 못했던 끔찍한 모습의 환자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황폐해졌다.

그녀들 중 일부가 술이나 환각제 등에 손을 대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어떤 병사들은 우리가 지나가면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기 까지 한다고요. 그럴 때면 정말 못 참겠어요.”

예쁘장한 젊은 간호사 한명이 울상을 지으며 호소했다.
“흠~ 정말 힘들군. 그래 이렇게 하자.”

나이팅게일은 우선 저녁 8시 이후에는 간호사들이 병동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 대신 자신이 직접 매일 넓디넓은 병동을 돌며 병사들 한명 한명을 일일이 회진했다.

환한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어디가 아픈지, 몸이 아픈 거 말고 다른 걱정거리는 없는지….

병사들은 30대 중반이었던 나이팅게일에게서 고향의 친 누나 같은 푸근함을 느꼈다.
저녁 8시가 되면 만날 수 있는 나이팅게일에게는 병사들이 지어준 별명이 생겼다.

나이팅게일이 회진에 나타나면 “등불을 든 여인(Lady of the Lamp)이 오셨어.”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다.

영웅의 귀국
나이팅게일의 이름은 조용히 조용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쟁터는 물론 본토까지도 나이팅게일의 헌신적인 활동이 알려졌다.

물자와 의약품, 의료기구등이 모자라자 남몰래 사재 3만 파운드를 털어 환자들을 위해 썼다는 사실도 밝혀지면서 영국인들의 나이팅게일 사랑은 신드롬처럼 번져갔다.

1855년 5월부터 나이팅게일은 부상환자들의 복지, 심리 상담 등에 전념했다.
영국정부는 그즈음 나이팅게일을 크림지역의 야전병원에 파견했다.

나이팅게일의 명성을 시기한 크림 야전병원 간호단장은 그녀가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데, 마침(?) 나이팅게일 크림지역에 도착하자마자 현지 풍토병에 앓아누웠다.

“흥. 그것보라지요. 사람은 자기가 맡을 소관이 있는 거지요, 나이팅게일은 스쿠라티 야전병원에만 전념하면 돼요. 여기 크림지역은 우리가 맡습니다.”

그러나 1856년 3월 영국정부는 나이팅게일을 모든 전장의 간호단 최고책임자로 임명했다.
얼마 후 전쟁이 끝났다.

야전병원에서 치료받던 마지막 환자가 퇴원수속을 마쳤다.
야전병원에서 모든 부상병이 빠져나가자 나이팅게일의 간호단도 짐을 꾸렸다. 근 1년 6개월 만에 돌아가는 고향.
영국 고위공직자로부터 전갈이 왔다.

“잘 아시겠습니다마는 영국인들은 나이팅게일 씨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헌신적인 노력이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까닭이지요. 따라서 정부에서는 돌아오는 길에 성대한 환영회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항구에 나와서 영웅의 귀국을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은 공식적 귀국선을 타지 않고 조용히 영국으로 들어갔다.
어떠한 환영행사도 거부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갔고, 지금도 부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내 의무를 다하려 했을 뿐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영웅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제 자신에게 허락할 수 없어요.”
나이팅게일은 귀국하자마자 전장에서 배우고 느낀 경험을 살려 새로운 군 의료체계를 구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한 자리에서는 “허술한 군 의료체계를 혁신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건과 위생, 충분한 영양공급을 위한 식사의 질 향상과 오폐수 시설 정비 등 전염병에 대비한 시설도 확충해야” 한다며 촉구했다.
나이팅게일은 가시적인 성과들을 얻어냈다.

1857년 8월 군대보건에 관한 왕립위원회 설립, 그해 군의학교 설립, 1858년에는 ‘영국군의 보건과 능률 및 병원관리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점에 관한 보고’ 출간 등의 성과 외에도 식민지 인도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의 의료시스템에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할 수 있었다.

간호의 재탄생
나이팅게일은 그 후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며 연구와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1857년부터 병을 앓기 시작한 나이팅게일은 주로 런던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그녀의 관심은 전 인류애적인 보건과 의료환경 개선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영국군’ 만을 위한 의료체계 개선이 아닌, 가난하고 무지해서 열악한 환경에 방치되어 있을 세계 곳곳의 수도 없는 불쌍한 사람들….

그녀는 야전병원시절 병상에서 몸부림치는 한 병사를 보면서 ‘적군인 러시아 군인들도 똑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 나는 이제까지 영국군을 위한 의료체계 개선에만 매달려 왔다. 이제는 의료서비스에 소외된 모든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해.’

그녀는 우선 식민지 인도에서의 의료체계 개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1868년에는 인도에 총독부산하 위생국을 건립, 수많은 인도 사람들이 현대적 의료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일조했다.

나이팅게일은 1910년 8월 13일 사망했으니 90세로 꽤 오래 살았다.

이미 사십 전에 크고 작은 병을 앓기 시작했으니 그 자신이 평생 병마에 시달린 셈이다.
1901년부터는 시력을 잃어 마지막 십년은 거의 맹인으로 살았다.

그녀는 “1927년 2월 7일, 병에서 신음하는 자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후에 밝힌 바 있다.

나이팅게일의 삶이 빛나는 것은 그녀의 헌신적이고 진심어린 ‘간호관’에 있다.

1860년 ‘나이팅게일 간호사학교’를 세움으로써 현대적 간호 직제의 확립과 전문화된 직업인으로서의 간호사 양성을 가능케 했다.

당시 영국에서도 아직 간호사의 역할은 의사의 잔심부름꾼이나 환자를 돌봐주는 여자 시녀 정도의 열악한 지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궁궐내의 무수리나 의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이팅게일의 또 다른 업적은 뒤낭이 세운 ‘적십자’의 창설동기가 됐다는 것이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20년 이탈리아 피렌체 지방을 여행 중이던 영국의 부잣집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어, 불어, 러시아어에 능하고 음악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딸이 간호사가 되겠다는 것에 반대했다. 그때 만해도 간호사는 전문교육기관이 없었고 병원에서 견습하거나 종교단체나 봉사단체에서 운영하는 기초적인 과정만이 존재했었다.

또한 사회적 대우도 비천했다.
나이팅게일은 ‘간호’라는 개념을 ‘병수발’이라는 차원에서 ‘환자들을 위한 전인적(全人的)인 봉사와 헌신’으로 지평을 넓혀 놓은 영웅이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1820년에서 1910년까지 생존’
영국 이스트웰로에 있는 백의의 천사의 묘비에는 새겨진 글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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