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단 사흘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사흘만…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
“첫날에는 나를 가르쳐 준 고마운 앤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보겠습니다.
그리고 산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별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큰길로 나가서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점심때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도 구경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 사흘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헬렌 아담스 켈러 (Helen Adams Keller. 1880~1968) 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미국 유수의 하버드 대학 래드클리프 칼리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세계적인 아동·인권 운동가이자 작가로 활약했다면 쉽게 믿을 수 있을까?
그러한 3중의 중증장애 속에서도 위와 같이 노래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헬렌 아담스 켈러 (Helen Adams Keller. 1880~1968)는 1880년 6월 27일 미국 알라바마 주 투스컴비아의 한 부호집안에서 태어났다.

“여보 이 아이는 유난히 더 피부가 하얗구려. 우유처럼 흰 피부에 복숭아 빛 뺨이라니.”
미 합중국 육군 예비역 장군출신으로 지역 신문의 편집국장으로 있던 아더 켈러는 아내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새로 태어난 딸을 기뻐했다.

아이는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켈러 가(家)와 어린 헬렌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그녀의 생후 19개월 되던 어느 날 이었다.

▶암흑 속으로
“으음~ 이거 큰일이군. 아이가 영 신통치 않아….몸이 이렇게 불덩이 같으니”
“의사는 왜 이렇게 늦는 걸까요.”
헐레벌떡 들어온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홍열이나 수막종 같은데 아마 위에도 출혈이 생겼을 겁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의사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그런데 뭐요. 도대체 뭐냔 말이오. 아이가 위독하기라도 하단 말이오?”

“아이가 인사불성인 것으로 봐서는 뇌에서도 출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심각한 후유증이 올 수도 있겠습니다. 이럴땐 그저 신의 가호만을 빌게 될 뿐이지요.”
의사의 불길한 예상은 들어맞았고, 신의 가호 따윈 없었다.
아이는 이후 시각과 청각을 잃어갔다.

부모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천사 같은 딸에게 이런 불행이 닥치다니….
그러나 무심한 세월은 잘도 흘러갔다.

헬렌의 나이 어느덧 일곱 살.
헬렌은 완전한 실명에 귀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동안 헬렌에게 60여개 가 넘는 수화를 가르쳐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죽고 나면 저 아이를 누가 돌본단 말인가?’
헬렌의 부모는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설리번 선생님
1886년이 됐다.
어머니는 여전히 헬렌 교육문제로 골머리를 낳고 있었다.
“여보 오늘 찰스 딕큰의 글을 봤어요.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로라 브링맨이라는 사람이 교육을 통해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였어요.”

그녀는 창각 장애인 치료 전문가 그레이엄 벨을 방문했다.(그레이엄 벨은 최초로 전화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보스턴에 있는 ‘펄킨스 시각 장애 학원’을 찾아가 보면 뭔가 돌파구가 나올 것입니다.”(벨)
어머니는 벨의 권유대로 보스턴으로 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앞으로 헬렌을 지도할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담당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 선생님이 저렇게 어려서야 어디 우리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겠나?’
이때 원장의 말했다.

“어머니께서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압니다. 그렇습니다. 헬렌을 가르칠 설비번 선생님은 이제 겨우 20살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설비번 선생 역시 어릴 적부터 시각장애를 앓아왔고 그걸 본인의 의지로 극복해 냈습니다. 자신이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누구보다도 헬렌의 마음을 잘 읽으리라 믿어요. 설리번 선생은 인내심과 통찰력도 뛰어나답니다. 따님의 교사이자 친구로서 설리번 선생은 적임자로 보입니다.”
어머니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설리번을 딸의 교사로 받아들였다.

위의 시에서 첫 번째로 언급한 “고마운 앤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보겠습니다.”라던 바로 그 ‘앤 설리번’과 헬렌 켈러의 50년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헬렌 켈러의 일생은 앤 설리번 선생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넓은 세상으로
설리번은 우선 헬렌과 소통하는 법을 만들어야 했다.
그녀는 엄마가 아이에게 온 종일 이야기하는 것처럼 헬렌의 손바닥에 끊임없이 글을 쓰며 (촉각을 이용) 의사를 소통했다.

“헬렌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고, 우리의 모든 감정마다 이를 표현하는 형용사가 있어. 이를테면 네가 몹시 기분이 좋을 때와 어떤 일로 화가 났을 때와 같은 때를 각각 표현하는 말과 글이 있다는 거지….”
설리번은 헬렌에게 부모 이상으로 헌신적인 스승이었다.

헬렌과 설리번의 대화 통로는 두 사람의 손바닥에 쓰는 글이었다.
헬렌은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인 보스톤의 퍼킨스 학교와 뉴욕의 라이트-휴머슨 학교를 졸업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설리번 선생은 헬렌의 그림자가 되어 그녀를 도와줬다.

“헬렌 기뻐해라. 래드클리프 칼리지에서 입학허가를 얻어냈어.”
“정말요? 선생님. 믿어지지 않아요.”

“장하다. 헬렌. 어려움을 극복하고 정말 잘 자라주었구나.”(아버지)
“설리번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나 수고하셨습니다.”(어머니)

헬렌은 모든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19살의 나이에 하버드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했다.
헬렌 켈러의 인생은 이제 또 하나의 목표를 향해 비상한 것이다.

“선생님 그 동안은 교육을 받아 무지함을 깨우치고, 생활하는데 불편만 없으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거기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동안 필사적으로 공부했던 모든 지식을 뭔가 생산적이고 보람 있는 일에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선생님이 저에게 등불이 돼 주셨듯이 저도 남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살겠어요.”

“헬렌 네 마음이 너무나 대견하구나. 그래! 너도 뭐든지 할 수 있다. 너는 보고 듣지 못하지만 그 대신에 하나님은 너에게 엄청난 집중력과 예지력을 주셨지. 지금서야 말이지만 너를 가르치면서 네 총명함에 깜짝 놀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란다.”

▶사회주의에의 꿈
헬렌은 1904년 대학교를 졸업했다. 1분 1초를 아껴 열심히 공부한 헬렌은 독일어를 비롯해 5개의 언어를 익혔으며, 특히 영문학에서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거뒀다.

헬렌은 시청각 장애인으로는 미국 최초로 학사학위를 딴 사람이 됐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헬렌은 미국의 유명인사가 됐다.

헬렌과 설리번 선생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헬렌은 사회주의에 깊이 심취했다.

헬렌의 부모도, 설리번 선생님도, 헬렌의 인각승리에 감동한 많은 사람들이 헬렌의 사회주의 심취를 염려했다.
“헬렌. 네가 사회주의자 존 메이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보고 너를 존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아. 우리도 많이 걱정하고 있단다.”

“선생님 존과 저는 같은 신념을 가지고 있어요. 전쟁을 반대하고 노동자의 복지와 인민의 평등을 지향하는 신념이지요.”

“네가 알아서 할 일지만 걱정은 되는구나, 이 나라 미국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지.”
그러나 헬렌의 사회주의 동경은 심화돼갔다.

“전쟁이란 거의 제국주의적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로서 전체 노동 계급에게 고통을 주고,
희생과 가난을 낳지만 그것을 보상받을 길이 아무데도 없는 인류가 만든 가장 못씁 일입니다. 미국은 절대로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선 안 됩니다.`

정부는 헬렌켈러의 사회활동에 서서히 부담을 느꼈다.

“여성 참정권을 보장하고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를 당장 금지해야 합니다.”
헬렌은 반전활동 외에도 여성·아동 문제에 깊숙이 뛰어들었다.

▶사랑과 역경
1910년 헬렌 켈러는 안구를 빼내고 유리로 만든 의안을 넣었다.
의안은 헬렌 켈러의 외모를 돋보이게 했다.

이때부터 헬렌은 사진 찍히는 것에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헬렌은 이즈음 ‘페이건’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페이건은 헬렌에게 책 읽어 주는 것을 좋아했다.
헬렌과 페이건은 보스턴 시청 호적계를 찾아 혼인 신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헬렌의 어머니는 이 결혼을 이상하리만치 완고하게 반대했다.
평생의 친구인 앤 설리번 선생님조차 둘의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헬렌은 가슴을 끊는 고통 속에 페이건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헬렌은 연인과의 이별을 견디지 못하고 여러 달 동안 방안에만 틀어 박혀 목석처럼 살기도 했다.
하지만 헬렌은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섰다.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있는 삶은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야. 시각장애인과 어린이, 여성들을 위해 무언가 일을 해야 해.’
잠시 사랑의 열병을 앓고 쓰러졌던 헬렌은 다시 사회로 돌아왔다.

1918년 헬렌은 할리우드에서 자신의 역경을 담은 자전적 영화 ‘해방’을 찍었다.
그러나 전쟁 탓에 많은 공연이 취소돼 영화 흥행은 실패로 돌아갔다.
영화의 실패는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헬렌 켈러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헬렌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시각장애우들을 위한 획기적인 성과를 이뤄낸다.

1931년 4월, 헬렌은 뉴욕에서 세계 32개국의 대표들이 참석한 ‘제1회 세계 시각장애우 회의에 참가해 “시각장애우들을 위한 표준점자의 채택”을 강력히 호소했다.
‘브라유 점자’가 세계 표준점자로 채택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이해 헬렌은 미국의회에서 “시각장애우를 위한 도서관 체계 개선”을 호소해 ‘프랫-스무츠 법안’을 입법화 시켰다. 이에 다라 전국의 도서관에는 시각장애우를 위한 점자책들이 비치되게 된다.
헬렌은 왕성한 활동 중에 설리번 선생님이 위중하다는 것을 들었다.

1929년 백내장이 심해져서 오른 쪽 눈을 없앤 설리번 선생님은 1934년에는 완전히 실명했다. 그리고 두해가 지난 1936년 10월 20일 앤 설리번 선생님은 헬렌의 곁에서 손을 꼭 잡은 채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을 일컬어 “둘의 몸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 하곤 한다.
헬렌은 그 평생의 동무이자 길잡이를 잃은 것이다.

▶시각 장애우들의 빛
헬렌은 다시 슬픔을 털어내야 했다.
1940년 헬렌은 사회주의 계열의 미국 구조선 활동에 참여한다.
미국 FBI는 헬렌에게 수상한 혐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으나 사회적 봉사활동 외에 특별한 혐의를 발견하지 못했다.

헬렌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쟁에서 실명한 부상자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기부금을 모으고 시설을 만들고 재활 교육센터를 설립해 시각장애우들을 도왔다.

6개월 동안 70여 곳의 육군 해군 병원을 찾아다니며 부상당한 군인들을 만나고 그들을 위로했다.
1946년 헬렌은 미국 시각장애인 협회의 자매단체인 외국인시각장애인 협회의 도움으로 ‘시각 장애우들의 인권개선을 위한’ 첫 번째 세계여행에 나선다.

그 후 11년 동안 헬렌은 시청각 장애우들의 처우와 인권개선을 위해 5개 대륙의 36개국을 방문했다.
헬렌 켈러는 1968년 6월 1일 아칸리지에서 숨을 거두기 전까지 평생을 시청각 장애우와 어린이 여성을 위해 헌신한 여성이다.
최후의 7년간은 지병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1964년 헬렌은 린던 존스 대통령이 주는 미국의 최고 시민상 ‘자유 메달’을 받았다.
1년 뒤에는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는데 헬렌 자신은 이런 상을 수상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헬렌 켈러의 삶은 극한의 장애를 극복해 내고 인간 삶의 진정한 가치를 구현한 위대한 삶으로 조명 받는다.
그리고 헬렌 켈러를 성심과 극진한 사랑으로 교육시켜 암흑 속에서 평생을 보냈을 지도 모를 한 영혼을 세상의 빛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낸 설리번 선생의 헌신이 주는 교훈도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헬렌 켈러의 삶은 교육과 인간애의 가치를 한 눈에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다큐멘터리의 하나다.
끝으로 헬렌 켈러의 명언 몇 가지를 소개한다.

“나는 나의 역경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냐하면 나는 역경 때문에 나 자신, 나의 일,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정말 불행할 때, 세상에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타인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한,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

“태양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희망의 빛을 가지는 일입니다. 장애인들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은 마음속의 빛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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