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위한 헌신과 섬김의 일생

  
 
  
 
진정한 평화상
1979년, 유엔이 정한 세계 아동의 해.
이 해에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후보자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이 됐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한림원에서 열린 그 해 노벨 평화상 수상식 현장에 나타난 사람은 구부정한 모습의 여리고 약하고 남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한 수녀.

‘마더(엄마)’로 불리는 테레사 수녀(1910. 8. 27~1997. 9. 5)였다.
“너무 많은 취재진이 몰려 진땀을 뱄어요. 제가 하늘나라로 빨리 가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요.”
“와하하~”

취재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저에게 보여주시는 그 관심들…. 그 관심의 조그만 부분이라도 어렵고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게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풍요에 겨워 자원을 버리고 낭비하며 사는 수많은 선진국의 시민들이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아무런 도움도 못 받고 죽어가는 불쌍한 어린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어린이들은 지구상의 곳곳에서 신음하고 있지요.”

테레사 수녀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이내 숙연해졌다.
“수상 파티는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노벨상 위원회에서도 받아들여 주시리라 믿습니다….그리고 여러분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세계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기금을 모금하고자 합니다.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노벨 평화상 상금 1억 8천만원외에 5천 2백 만 원의 기금이 모금됐다.

그 돈은 세계 각국에서 신음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요긴하게 쓰였다.
노벨평화상은 정치적 이해나 국제정세에 따라 엉뚱한 사람 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사람에게 수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세계인들은 1979년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대해 전폭적인 공감을 보냈다.
받을 만하고,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 받았다는 것이다.

가시밭길을 택한 소녀
‘아그네스 브락스 곤히야’(테레사 수녀의 본명)라는 아이가 태어난 것은 1910년 8월 27일 유럽 동부의 유고슬라비아에서였다.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어왔으며 중산층 이상의 넉넉한 집안이었다.

“저 아이는 성당에만 가면 신부님 말씀에 얼마나 집중하는지 옆에서 꼬집어도 모를 지경이라니까”
아이의 부모는 또래에 비해 유난히 종교성이 강한 아이를 보며 흡족해 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 해 했다.
“혹시 커서 수녀님이라도 된다고 하면…”

소녀는 열두 살이 되자 어느 기도모임에 가입했다.
“여보, 아그네스의 신앙심이 신실한 것은 축복 받을 일이나 그렇다고 수녀가 돼서 여자의 행복까지 포기하고 사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그러나 소녀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자신을 하느님을 위해 바치겠노라고 결심한다.
소녀는 유고의 예수회에서 보낸 인도 캘커타 선교진의 한 선교사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거기서 많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
19세가 되던 1929년 1월, 아그네스는 세계의 오지 중의 오지였던 히말라야로 날아간다.

수녀가 돼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봉사활동을 통해 세계의 오지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마더 테레사’의 위대한 여정의 시작은 그렇게 히말라야 다르엘령의 한 수도원에서 시작됐다. 1937년 종신허원을 했는데 그녀는 이미 테레사 수녀로 불리고 있었다.
평온하면서도 혹독했던 만 2년의 수련기간이 끝나고 아그네스 수녀는 인도 캘커타 동부에 위치한 ‘성 마리아 여고’로 부임했다.

수녀원을 떠나라
그녀는 이곳이세 지리교사로, 지도 수녀로 활동하며 17년을 보낸다.
테레사는 수녀라기보다는 교사로서 일했다.
어느 날 그녀는 특별한 이유 없이 캘커타의 빈민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봤다.
그녀가 받은 충격은 말할 수 없었다.

“상처 입은 여인의 환부에는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있었어요. 아무도 돌봐주지 않았죠. 하긴 그 옆에는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다 밤사이 죽은 노인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지요. 그 생지옥 속에서 누가 누구를 도와줄 수 있겠어요. 청소년들이 충동적으로 저지른 불장난으로 태어난 신생아들이 쓰레기 더미에서 울고 있었죠.

아! 이곳은 정녕 신이 없는 곳인가? 학교에서 평온한 생활만 보내던 나에게는 엄청난 도전이었죠.“(테레사 수녀의 회고)

학교로 돌아오던 기차 안에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 째 바꿀 음성을 듣는다.
‘학교를 떠나라 수녀원을 떠나라’
그것은 영혼 깊숙이에서 부터 울려나오는 신의 음성이었다.

‘나는 그 음성을 ’부르심 속의 부르심‘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내가 수녀원을 떠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지요. 그 음성은 나에게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신의 명령이었지요.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테레사는 수도원에서 평생을 하느님을 섬기면서 살겠노라고 맹세했던 종신허원을 깨야만 했다. 세상으로 나가서 봉사하는 ‘재속 수녀’가 되려면 엄격하고 까다로운 교회법상의 절차를 밟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소속회 원장과 캘커타 대주교를 거쳐 바티칸의 교황청에게까지 허락을 얻어야했다.

초조함 속에 기다리던 ‘탈 수도원’이 성사되자 테레사는 언젠가 배워두었던 간호학을 활용하기로 했다.
1948년 12월 20일, 수도원을 나와 세상의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향했던 테레사 수녀는 빈민가 중의 빈민가인 ‘모티즈 힐’에 첫 발을 디뎠다.

작은 시작, 위대한 열정
테레사는 이곳에서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학교를 세웠다.
학교래 봐야 비를 피할 천정에 글씨는 칠판을 대신해 땅바닥에 써야하는 열악한 곳이었다.
“배움을 향한 우리의 열정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것입니다.”

배우겠노라고 모여든 5명의 어린이들…그들이 이 학교의 최초의 학생들이었다.
한해가 지나자 학생들도 30명으로 늘어났다. 혼자 가르치기에는 좀 벅찬 감이 들었다.

“그때 하느님께서 천사 3명을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자원 봉사하겠다는 교사가 찾아 준 것이지요.”(테레사의 회고)

거기에 일부 독지가들이 자금을 마련해 보내 주기도 했다.
테레사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일이 덜어지자 테레사는 오래 전부터 구상하던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병에 걸려 학교를 나오지 못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마을에 반드시진료소를 설치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시설도, 약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나 테레사는 머뭇거리지 않고 ‘일단’ 진료소를 열었다.

조악한 테레사의 진료소는 그러나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자원봉사하려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줄을 이었다. 그들의 입을 통해 퍼져나간 테레사의 진료소에는 의약품과 예방약 등이 도착되기 시작했다.
“어머! 스바시니 다스.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온 거니? 정말 눈물 나게 고맙구나.”

“의료봉사하고 돌아온 한 의사에게 선생님 이야기를 들었어요. 인력과 의약품이 모자라 고존하고 계시다고요. 작은 힘이나마 선생님을 돕고 싶어요.”

스바시니 다스는 테레사가 지리 선생으로 있을 때 가르쳤던 옛 제자다.
이러한 조력자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마침내 1950년 테레사는 캘커타 대교구의 허락 하에 자신의 수도회를 창설했다.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들과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교육과 의료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한 ‘사랑의 선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 선교회는 ‘예수님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기 위해 탄생했습니다. 우리는 ’청빈‘ ’정결‘ ’순명‘ 외에 ’가난한 자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바텨 헌신한다.‘는 또 하나의 강령을 되새기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것입니다.”
1950년 10월 7일, 로마교황청은 ‘사랑의 선교회’를 정식 인정했다.

교황청은 이 선교회의 총장을 ‘마더(Mother; 엄마)’로 부르기로 했다.
‘마더 테레사’가 된 것이다.

가장 낮은 곳
1952년 마더 테레사는 큰 병원 옆 도랑에서 한 남자가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테레사는 즉시 병원에 그 남자를 치료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테레사는 인근 약국으로 뛰어가 응급약을 구해왔다. 하지만 그 남자는 죽어있었다.

한 영국 부자가 가슴에 애완견을 안은 채 고급 세단을 타고 가며 그 광경을 무심히 지켜봤다.
‘개나 고양이만도 못한 이 비참하고 불쌍한 인생들을 어이해야 할까.’

테레사는 얼마 후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집’을 개설했다.
어갈 곳이 없어 거리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그들은 죽음만이라도 인간답게 죽기를 원했던 것이지요.”(테레사의 회고)
테레사는 고름과 진물이 질질 흐르는 그들을 돌봤고 냄새 때문에 코를 감싸야만 하는 더러운 몸을 손수 씻겨 주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 태반이 열흘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그러나 이곳을 연지 3년이 지나자 살아남는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사람들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집을 다녀갔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들의 일생에서 단 한번이라도 인간으로서 대우 받았다는 따뜻함을 느끼고 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이지요.”(테레사의 회고)

마더 테레사의 선교회는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환자들을 돌봤다.
“우리들의 소지 물은 항상 최소한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3벌의 사리(인도인들이 몸에 감아 입는 천 형태의 옷), 튼튼한 신발 한 켤레, 식사 할 접시 하나, 그리고 십자가와 묵주…이것이면 충분하지요. 우리들이 가난해 지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탁기와 발전기 등을 기증하겠다는 사람들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 정도 노동은 우리가 감수할 수 있어요. 단지 전화는 응급상황을 대비해 한 대 받았습니다. 요긴하게 잘 쓰고 있지요.”(테레사의 회고)
테레사는 봉사의 영역을 넓혀나갔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 이었다.

“미혼모에게 나서 버려진 아이들, 무책임한 부모들이 보내 팽개친 아이들, 고아들, 병들어 거리에 방치돼 죽어가는 아이들, 정박아들, 장애아들이 더러운 진흙 속에서 뒹굴고 있었지요.” (테레사의 회고)
마더 테레사는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의 집’이라는 어린이 수용시설을 만들었다.
주정부, 교회, 독지가들이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엄마의 집
‘테레사의 집’은 죽어가는 사람들, 버려진 어린이들을 넘어 나환자를 위한 집, 억압받는 여성들을 위한 집 등 영역을 넓혀나갔다.

1957년부터는 진료차를 지원받아 도심 곳곳의 빈민가를 돌며 의료 활동을 벌였다.
“1975년부터는 성인 중증장애인과 어린이 뇌성마비 환자들을 위한 기관을 열었지요. ‘81년부터는 8개의 슬럼가(빈민굴)에 학교를 열수 있게 됐어요.”

마더 테레사는 그해에 교도소에서 나와 매음굴로 향하는 여성들을 위한 자활센터도 마련했다.
그녀가 설립한 모든 ‘집’에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배우고 인간으로 존중받았던 모든 영혼들은 그 집들을 일컬어 ‘엄마의 집’이라고 부른다.
마더 테레사는 그 후 1997년 숨을 거들 때까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다.

테레사는 1979년의 노벨상 수상 외에도 수없이 많은 인권단체에서 본인도 헤아리지 못할 정도의 많은 상을 탔다.
마더 테레사는 엄마의 집에서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 사는 세상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사랑을 실천했다.
19살에 수녀의 길을 택하고 37세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세상으로 뛰쳐나와 반세기 동안 남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마더 테레사는 1983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병상에서도 ‘사랑의 수도회’를 지휘하던 마더 테레사는 1997년 9월 5일 8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녀의 삶은 한결같은 ‘봉사와 헌신’의 일생이었다.

“이웃에 대한 진정한 섬김의 마음속에서 모든 것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야말로 사랑과 평화의 세상이지요.”

1995년 독일의 한 방송인과 가진 그녀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마더 테레사가 남긴 말이다.
마더 테레사는 봉사를 행복으로 알고 살다 간 이 시대의 성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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