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농촌생활…7년 방황에서 행복한 예비 엄마로 살다

  
 
  
 
“어텐션 플리즈!” 영어 선생님의 말에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눈망울이 순간 ‘반짝’ 빛났다.
선생님은 영어단어가 적힌 카드를 가리키고 하나하나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캣(cat)!”
아이들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따라한다.
“캣!”

선생님은 홍지아씨(33, 충주시 살미면 내사리). 한국 이름이지만, 그녀는 사실 필리핀에서 왔다. 그러고 보니 생김새가 좀 다르긴 하다.

깊은 빛깔의 피부와 남아시아 사람 특유의 미간, 부드럽게 컬이 진 머리카락….

그럼 영어강사를 하러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왔을까? 그렇진 않다.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건 사실 본업이 아니라 부업일 뿐이다.

홍씨는 어엿한 농촌 ‘살미면 주민’이다.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지 7년째인 그녀는, ‘나름대로 베테랑 농사꾼’이다.

1999년 남편 홍운석씨(42)와 만나 결혼한 뒤 먼 타국 땅에 정착하여 시부모님과 남편, 지아씨, 이렇게 네 식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인 한국문화가 문제였다”
무엇보다 문제는 언어였다. 어렵다고 소문난 러시아어보다 더 어려운 게 한국어다.
복잡한 예절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간 한국말은 영어에 익숙하고 영어식 사고방식에 길들여진 지아씨에게 힘든 숙제였다.

“한국에 오기 전에도, 오고 나서도 한글 공부 정말 열심히 했어요. 매일 매일….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웠어요. 영어에 비하면 정말 어려운 언어이고 복잡한 언어이니까요. 지금도 사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요.”

동네사람들 만나면 일일이 고개 숙여 인사해야 하는 것조차 지아씨에게는 거의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필리핀에서 데려온 며느리라 예의가 없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허리가 부서져라’ 인사를 했다.

“땅바닥에 앉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요. 그냥 남자들처럼 앉으면 편할 텐데, 여자가 앉을 때는 이렇게 양 다리를 한쪽으로 포개어 앉아야 한다고 하시니까…. 처음엔 다리가 마비되고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땀이 날 정도였어요.”

결혼 몇 년째 임신을 하지 못한 것도 엄청난 스트레스였다.(물론 이 이야기는 시어머니께서 자리를 비운 사이 오고 갔다.)

종합병원에 가서 정밀검진을 받은 결과, 임신이 안 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음주가 잦았던 남편에게 원인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시아버지께서는 종종 “왜 애가 안 생기냐”며 방바닥을 탁탁 내리치며 호통 치셨다. 그때마다 지아씨 가슴도 쿵쿵 내려앉았다.

“겁이 났어요. 한국의 이런 문화, 남아선호사상 같은 걸 몰랐기 때문에 내가 정말 뭘 잘못했는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힘들었어요. 다행히 지금 임신을 해서 해결이 되었지만, 이런 부분은 정말 한국에 와서 처음 경험한 일이었거든요.”

지아씨는 결혼 초기 남편과도 자주 싸웠다. 역시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는데, 구체적으로는 한국 특유의 남존여비 사상 때문이다. 남편이 폭력을 휘둘러서 필사적으로 저항한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이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아서 반말을 하면 왜 남편한테 반말하느냐고 화내고, 내가 하는 일을 절대 도와주지 않고…. 저는 이런 거 이해를 못했어요. 남편이 잘못해도 내가 먼저 사과해야 하고, 특히 진짜 싫었던 건 대판 싸우고 나서 나는 말도 하기 싫은데 다음 날 아침 밥상을 차려서 남편한테 공손하게 “식사하세요”라고 말해야 할 때였어요(웃음).”

물론 지금은 부부 간의 금실이 좋아 부러움을 살 정도란다. 남편 홍운석씨는 얼핏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지아씨와 사진을 찍자고 하니 쑥스러워하면서도 선뜻 집 앞에 가서 포즈를 취한다. 막상 섰지만 카메라가 영 어색한지 표정이 딱딱하다 못해 근엄하기까지 했다.

“에이 참, 좀 웃으시고, 다정하게 서로 꼭 붙으셔야지요.”

그랬더니, 홍운석씨는 손을 뻗어 아내를 꼭 끌어안는다. 부부의 얼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급한 볼일 때문에 얼른 읍내로 나가 봐야 한다는 그를 억지로 붙잡고 물어봤다.“사진은 거짓말을 못한다고 합니다.

결혼이민자 후배들, `힘들어도 참고 견뎌라...”

“갑자기 필리핀에 있을 때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눈물이 나네요. 우리 집은 딸만 셋이고 저는 셋째 딸인데, 아버지가 안 계세요. 제 어머니는 필리핀에서 세 딸을 혼자 먹여 살려야 했어요. 너무 가난해서 하루에 밥을 한 끼밖에 안 먹었어요. 너무 배고프고, 너무 공부가 하고 싶었는데…. 죽기 살기로 고등학교를 간신히 마쳤지요. 청소도 하고, 미용실에서도 일하고, 장사도 했어요. 학비는 알아서 해결해야 했으니까요. 나처럼 한국에 오는 친구들은 아마 대부분 본국에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겠지요. 저는 그 사람들에게 이 말밖에 할 수 없네요. 어렵고 힘들어도,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견디라고….”

그녀의 감정이 이토록 격해진 것은 아마 충주결혼이민자지원센터에서 회장으로 일하며 보고 들은 경험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농촌 여성 결혼이민자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동시에 여러 문제점도 불거졌다.

특히 농촌으로 시집온 이민여성 중 일부가 결혼생활 도중 도망가는 사건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그녀들이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나서 도망간 것이라 의심하며 욕을 하곤 한다. 그러나 홍지아씨의 생각은 달랐다.

“바람이 나서 도망가는 게 아니에요. 남편, 시부모와의 문제 때문이죠. 제가 상담해 본 대부분의 경우가 폭행을 견디다 못해 도망친 경우였어요. 사람들은 외국에서 온 여자들이 바람을 못 피워서 안달하는 것처럼 의심해요. 그렇지 않아요. 다들 본국에서 힘들게 살다가 좀 더 행복하게 살려고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잖아요. 도망가도 갈 곳이 없어요.”

홍지아씨는 바람피워 도망가는 것으로 의심부터 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보다는 문화적 차이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 주고, 불합리한 처우에 대해 공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고 대책까지 주문했다.

농촌 여성 결혼이민자로서의 삶이 무작정 장밋빛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국 역시 후진국이던 시절 광부로, 간호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국을 떠났던가. 그들 모두가 타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들의 고생담 역시 홍지아씨처럼 눈물 없인 말할 수 없는 슬픈 이야기들이다.

역지사지해 본다면, 홍지아씨 역시 한국이란 낯선 땅에서 7년 넘게 생활하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았을 터. 하지만 그녀는 이미 지역사회에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조금 있으면 행복한 엄마가 된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