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사 자격증 획득한 ‘똑순이 아줌마’ `내아이들, 남편을 위해 필요했다”

  
 
  
 
“어서 오세요!”
70년대 풍의 낡고 조악한 유리문을 밀고 손님이 들어온다. 식전 댓바람이 차지만 서너 평 남짓한 공간에는 훈기가 감돈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도록 남편이 탄불을 봐주기 때문이다. 부부의 정이 훈훈하게 느껴진다.
들어오는 손님의 파카를 받아 옷걸이에 걸면서, “머리 감았어?”

대뜸 반말부터 하더니 어리둥절해하는 기자에게 살짝 웃으며 친구란다.
커트 보를 씌우고 드라이를 시작하는 김봉해씨(36, 경북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정작 자신의 머리는 말리지도 못하고 급히 나온 바람에 찬 기운이 뚝뚝 흐른다.

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 11년 전 낯설고 물선 이곳 문경으로 시집 온 김씨가 미장원에서 다른 이의 머리를 만지고 있다. 상상도 못한 일이다.
아침 7시 50분, 급하게 머리를 만지고 외출해야 한다는 친구를 위해 7시 30분부터 기다렸다. 시골 동네라 시간개념이 다르다.

농번기에는 아예 문을 못 여는 날이 많지만 급하다고 호출 오면 날아다녀야 한다. 밭 일 하는 중이라 손님을 안 받고 싶지만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선 신용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인근 몇 개의 마을을 통틀어 단 하나뿐인 미용실이다.
“약속해 놓고 늦게 나오면 어떡해여.”

“미안, 설거지 하고 나오다 보니 늦었네” “신랑은 일 나갔어여?”
문경 토박이보다 사투리가 더 심하다. 이제는 자연스럽게 ‘요’ 가 안 나오고 ‘여’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영농후계자인 남편 권범우씨(40)와 결혼해 두 아들 재승(11), 호승(8)과 함께 이곳 문경에 정착해 산 지 올해로 11년째다.

그러니 문경 사람 다 된 셈이다. 친구 손경자씨(39)는 봉 미용실이 마을 여자들의 ‘만남의 장소’라고 소개한다. 하루라도 안 오면 궁금해서 못 견딘다. 동네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함께 차도 마시고 미용실에 딸린 방 아랫목에 앉아 수다도 떤다. 요리 얘기에서부터 주민들 일상사에다 자식들 교육문제까지, 요즘은 한미에프티에이(FTA)도 주제가 되는 등 다양하다. 봉 미용실 손님은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고령화된 농촌에서 당연한 일이다. 요즘처럼 날씨가 추울 때는 특별히 갈 곳 없는 노인들이 시간 때우러 많이 온다.

함께 이야기하며 놀다가 어르신들 집에 따라가 점심을 얻어먹는다. 워낙 성격이 소탈하고 적극적이어서 동네사람 누구와도 친하다.
“다 친구 같은 사람들이지여. 아래위로 나이 따지면 친구 못해여. 참, 아래는 거의 없네. 젊은 사람들이 없으니.”

기자가 손님인 줄 알고 들어왔다는 또 다른 아낙이 슬쩍 한마디 거든다.
“봉해씨는 심성이 너무 착해요. 부모님은 고사하고 이웃집 노인들이나 남 생각하는 것 보면 한국 여자들은 못 따라가여. 어떨 때는 제가 부끄럽다니까요.”

미용실 개업은 아무리 생각해도 머리를 잘 썼단다.
“처음에는 그저 아이들과 남편 머리나 만져 주려고 군에서 하는 직업훈련 프로그램 미용사반에 등록을 했어여. 점촌까지 나가서 공부를 했는데 막상 6개월 만에 자격증을 따고 나니까 슬며시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문경읍 내 미용실을 일 년 남짓 다니며 본격적인 기술연마를 시작했다. 개업을 위한 사전 작업을 마친 것이다.

물론 남편의 든든한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비어 있는 후배의 집을 빌려서 보일러 시공부터 벽지, 바닥공사, 전기공사 어느 것 하나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남편이 직접 했다. 자재도 직접 사서 차려 주었으니 남편이 일등공신이다.

그런 남편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수입은 얼마나 돼요?”
“수입이랄 거까진 없어여, 그저 애들 과자 값 정도나 벌지예.”


국제결혼 부부 ‘1호’
김씨, “그러나 외로운 신세”


미용실에서 2~3킬로미터 떨어진 김씨의 집을 찾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평지다.
새벽에 내린 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남아 있었고 아침 안개가 채 가시지 않아 더욱 고즈넉하게 느껴지는 작은 마을이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을 지나 마을 안쪽 끝으로 들어가니 가족의 보금자리가 나타난다.
보통의 시골집이라면 강아지나 누렁소, 닭 등이 눈에 먼저 뜨일 텐데 그녀의 집은 남다르다. 일렬로 늘어서 있는 네 대의 자전거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남편에게는 4남 2녀의 형제가 있지만 부모님과 한 마을에 살고 있는 김씨가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
아직은 정정하신 부모님이 따로 살기를 원하셔서 불과 삼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 새로 집을 지어 부모님을 모셨다. 각기 다른 공간에서 살고 있지만 실은 한 살림이나 다를 바 없다.

김씨의 고향은 하얼빈이다. 결혼하기 전 고등학교를 마치고 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사범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다.
그러나 한국인과 결혼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 권씨 또한 그때 중국에 들어간 지 60여 일이 다 되어 갔지만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여행 삼아 친구와 함께 하얼빈으로 향했다. 처음 남편을 소개 받은 김씨는 마음에 쏙 들었다. 훤칠한 키에 힘도 세 보이고 무엇보다 듬직해 보이는 품성이 좋았다.
“한국의 도시 남자들은 바람을 많이 피운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남편은 농촌 출신 총각이라는 점도 좋았고요.”
듣고 있던 사진 기자가 퉁명스레 던진다.

“누가 그래요?”
“TV에서 봤어요. 드라마에서.”
남편이 첫눈에 들었지만 그래도 김씨는 좋은 마음을 숨긴 채 보름 동안 찬찬히 관찰했다. 날이 더할수록 확신도 점점 굳어져 결국 한국행을 결정했다.
지금은 주변 8개 마을에서 12쌍의 부부가 있을 만큼 결혼이민이 일반화되었지만 김씨가 처음 한국으로 왔을 때만 해도 무척 외로웠다.

문경읍에서 김씨 커플이 1호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 같은 민족이라 말은 통했지만 당시만 해도 이미 농촌인구가 고령화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마음을 나눌 단 한 명의 친구가 간절했다.
“많이 외로웠어요. 중국에서는 직장생활도 했고 친구도 많았는데 눈 씻고 봐도 제 또래 젊은 여자들이 없었으니까요. 한 1~2년 지나면서 남편 부인들과 자연스레 가까워지게 된 거죠.”

처음엔 농사가 재밌었는데 할수록 고달프고 힘들었다. 주로 밭농사를 짓는데 경작 면적이 1만여 평이 넘는다. 열심히 일한 만큼 돈도 안 되는 것 같아 속상하다.
그래서 겨울이면 남편은 산불감시반 활동을 해서 부수입을 올린다. 물론 김씨는 미용실에 더 매진할 수 있어 살림살이는 그런대로 꾸려 갈 수 있다.

“여름에는 오토바이, 겨울에는 트럭, 오토바이 타다가 기름이 아까우면 자전거를 타지여.”
앞서 언급했지만 김씨 가족은 모두가 자전거 애호가들이다.
봄, 가을에는 가족들이 함께 자전거 나들이도 간다. 나들이래야 고작 동네 한 바퀴 도는 게 다지만 그래도 그 시간만큼은 세상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고 뿌듯하다.


불의의 사고로 농사 포기했던
남편, “그녀는 달랐다”

“이 사람은 바퀴 달린 물건은 모조리 타 봐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경운기, 콤바인, 트랙터, 관리기 등 바퀴 달린 기계는 모조리 다룰 줄 안다. 한마디로 손재주도 많고 지적 호기심도 무척 강하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남편이 하는 걸 보고 어깨 너머로 배운 게 전부다.
덕분에 4년 전 남편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1년 6개월 정도 병원생활을 하는 동안 김씨가 없었다면 농사를 파할 뻔했다.

그 넓은 밭을 기계 없이 농사짓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씨가 기계를 다룬 뒤부터는 일의 효율성이 훨씬 높아졌다. 전에는 남편 혼자서 이것저것 기계를 바꿔 가며 다뤘는데 이젠 역할 분담이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이 말에 껄껄껄 웃는 권씨.

“집사람은 정말 순진하고 성실합니다. 애들한테 하는 거나 부모님한테 하는 거나…. 그리고 너무 똑똑해요. 아내가 딴 자격증이 몇 개인지 모르겠어요. 한마디로 완벽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족 출신 여자들이 사기결혼을 하러 온다고 손가락질도 하지만 다 그렇지는 않아요.

물론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고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순박하고 착하거든요. 남편 하기 나름이지요. 남편이 제대로 대접 안 해 주니까 문제가 터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는 참말로 장가 잘 들었다고 생각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조선족들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면 남편이 적극적으로 대변해 준다. 그래서 늘 믿음직하고 든든하다.


“일등 며느리, 일등 어미여”

“음식요? 음식은 말할 것도 없소, 부지런하고 착하지여, 눈썰미 있지, 거다가 머리는 얼매나 좋은디.”
어머니의 며느리 자랑을 들으며 부엌으로 들어가 봤다. 전날 제사를 지냈다더니 바구니마다 음식이 그득하다.
“제사 음식도 지가 다하지, 장 담그는 거부터 김장까지, 나는 손도 안 댄다니까.”

부엌 냉장고에 ‘칭찬이 좋은 열 가지 이유’라는 글이 곱게 프린트 되어 붙어 있다.
김씨의 자녀교육 지침서다.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란 아이들이어서인지 두 아들 다 몸가짐도 바르고, 얼굴에도 총기가 흐른다. 큰애가 자라면서 부쩍 중국 이야기를 많이 한다. 외조부, 외조모에 대한 이야기와 엄마 아버지가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는지도 묻는다. 그럴 때면 국제결혼의 장점을 살려 아이들한테 중국어를 가르쳐 주고 싶지만 아직 작은애가 너무 어려 미루고 있다.

바쁜 농사일에 시간 내기도 만만찮아 둘이 한꺼번에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유치원 다닐 때는 어머니회 회장도 맡았는데 커가면서 점점 농사가 늘어나 학교 일은 손을 놨다.
그러나 부녀회 행사나 각종 여행 일정이 있으면 만사 제쳐두고 참석한다. 남편의 왕성한 활동 덕에 김씨도 덩달아 신난다.

인근 마을에 살고 있는 남편 친구들과 부부 계를 만들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 한국인 부부도 있지만 김씨와 마찬가지로 타국에서 결혼이민을 온 커플들도 많아 서로 잘 통한다.

매월 만나지만 언제나 아쉬워 헤어질 땐 다음 모임을 이야기할 정도다. 대륙에서 나고 자란 기질 탓일까? 가장 하고 싶은 것은 여행이라고 했다. 지금도 남편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가고 때론 가족끼리 여행도 가서 웬만한 곳은 다 가봤지만 여전히 목이 마르다. 돌아보면 11년 동안 정말 부지런하게 살았다. 1만여 평이 넘는 농사일만 해도 빠듯하다. 아니, 부모님 모시고 아이들 키우는 일만도 버겁다.

“어느 날 남편이 트랙터를 밭에 세워 두고 급히 다른 일을 하러 갔어여. 제가 집에다 끌어다 두고 싶었지만 다룰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배워버렸죠.”
필요하면 뭐든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미용사, 조리사, 운전면허증 다 필요해서 땄다. 적극적인 성격 덕분에 이웃과도 친해졌고 스스로 활동 영역도 넓혔다.
“활용해야죠, 별 돈도 안 들이고 가르쳐 준다는데. 내 아이들, 내 남편을 위해서 필요했어요. 배워두면 득이 되니까여.”
‘똑순이 아줌마’다운 말이다.
<농림부 자료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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