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삶의 질 높이는 생활개선회 만들 터

  
 
  
 
생활개선회는 여성농업인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대응하기 위한 학습단체 역할을 하고 있다.
전북 남원시 생활개선회장을 지내고 올해부터 전라북도생활개선회장으로 임기를 시작하는 소향순 회장(50세·남원시 아영면)은 표정과 행동이 똑부러져 ‘똑순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생활개선회원들이 항상 웃고 활기찬 활동을 하게끔 하고 싶다는 소 회장을 만나 지난 17년간의 생활개선회 활동과 여성농업인으로 걸어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천생연분’ 우리부부
전라북도 남원이 고향인 소향순(50)회장은 남편 김오진(52)씨와 결혼 후 서울에서 생활하다 1987년 다시 남원으로 귀농했다.
1979년 남원여고 졸업 후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소 회장은 공무원, 교사 등 많은 중매자리가 들어왔으나 결혼을 빨리 하고 싶지 않아 매번 거절을 했다.

남편과는 두 번의 선자리를 통해 만나 지금은 1남 2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편하고 처음 만난 선자리에서는 정말 별 말 없이 헤어졌었어요. 그러다 주위에서 꼭 한 번만 더 만나보라고 해서 몇 달 있다가 만났는데 그 때는 그 사람한테 순수함이 보이더라고요.”

호탕한 성격답게 서울로 직접 남편을 만나러 갔다는 소 회장은 그날 비가 굉장히 많이 내렸고 남편도 연락이 안 돼 공항 앞 슈퍼에서 우연하게 마주치지 않았으면 지금 부부의 연은 맺지 못했을 것 같다고 회상했다.
“천생연분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나봐요. 하늘에서 준 인연 잘 지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남편과 가족들 더 많이 사랑할꺼에요.”

남편의 사고와 귀농 결심
결혼 후 김포공항에서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서울과 김포읍에서 생활하던 소 회장은 1987년 남편이 갑자기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는 바람에 귀농을 결심했다. “그날 고등학교 콩쿨대회가 있었는데 남편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학생들하고 부딪쳤어요. 그 사고로 남편은 머리를 다쳐 9일동안 의식이 없었어요.”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는 소 회장은 당시 돈도 없고, 합의문제도 쉽게 풀리지 않아 많이 힘들었으나 무엇보다 남편의 후유증이 심해 결국 회사를 포기하고 귀농을 결심했다.
“어느 날 남편이 직접 회사에 사표를 제출했더라고요. 회사에서는 잠깐 쉬는 것으로 해서 처리를 해줬는데 그 길로 내려온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어요.”

소 회장은 처음에 남원 봉대리에 내려와서는 시집살이와 함께 농사에도 익숙치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노력을 통해 트랙터, 콤바인 등을 직접 운전하면서 논7,000평, 밭2,000평과 포도, 상추 등 복합영농을 하고 있다. 특히 손이 귀한 집안에 딸만 둘 낳아 많은 부담을 가졌으나 막내로 아들을 낳아 기쁨이 두 배에 달했다고.

생활개선회 시작
1989년 남원시농업기술센터직원의 소개로 남원시생활개선회에 가입해 생활개선회 활동을 시작한 소 회장은 처음에는 남편의 반대로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을 설득해 활동을 시작했고 처음 성과로 면단위 일일찻집을 계획해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면의 재정이나 인원도 부족해 만류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배운다는 생각으로 일회용도 안쓰고, 차도 커피대신 우리 차를 쓰는 등 노력을 하니까 성과가 보이더라고요.”

소 회장은 일일찻집에서 얻은 수익으로 다시 한 번 65세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경로잔치를 열어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래켰다. “면에서 일을 할 때는 경로잔치가 가장 뿌듯하고 기억에 남아요. 그 일로 생활개선회 홍보도 많이 됐고, 개인적으로도 인정을 많이 받았어요.”

전라북도생활개선회장 당선
2003년부터 남원시생활개선회장을 하면서 도연합회 업무에 적극 참여했던 소 회장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가정을 생각해 도회장직 출마에는 생각이 없었다. “직위에 대한 사심이 없었어요. 지나고 보니 오히려 그런 부분을 좋게 봐 준 것 같아요.”

물론 주위에서는 많은 권유가 있었다. 하지만 묵묵히 할 일만 다하고 후보 등록일까지도 회장직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 후보등록만 하고 두 명이 나오면 양보하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뜻밖에 후보가 세 명이 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포기하지 않고 경선에 참여해 당선돼 많이 놀랐다고 한다.

“2007년에 생활개선회는 회원들간의 친목이 젤 우선이에요. 나이도 어린편에 속하고 경험도 부족해 어깨가 무겁지만 생활개선회 임원들과 많은 협의를 통해 잘 이끌어 갈 꺼에요.”
소 회장은 붙임성 좋은 성격으로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별하고 자신에 대한 잘못된 점에 대한 지적도 당당히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간다.

또 “여성들만 있는 조직은 가끔 겉으로만 친한척하고 뒤돌아서서는 험담하는 경우가 있다”면서 “최대한 노력해 도생활개선회원들 모두가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낼 수 있도록 만드는 데 힘쓸 생각”이라고 말했다.

농촌봉사활동에 많은 노력
“17년동안 생활개선회활동을 하면서 배운 점이 많아요. 이 활동을 통해 친구도 얻고, 사회도 배우고 했는데 지금부터는 배운만큼 되돌려 줄 생각이에요.”
똑부러지는 외모만큼이나 말투도 똑부러지는 소 회장은 생활개선회에 가입한 후 지금까지 여성농업인들의 권익신장과 농촌봉사활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소 회장은 “아직도 여성농업인으로서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이 당당한 여성농업인으로서 인정받게 하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특히 농촌에는 독거노인들이나 소득이 적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활동을 많이 할꺼에요.”라고 밝혔다.

또 “생활개선회원들이 활동을 함에 있어 항상 웃음이 넘치고, 가정에서도 멋진 안방마님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소임인 것 같아요”라며 활짝 웃는 소 회장에게서 2007년 전라북도생활개선회의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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