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 시집 농촌에 정착한 그녀 “더 이상 굴곡 인생은 없다”

  
 
 ▲ 김에스트랄라씨는 남편 김 씨와 살다보니 매우 친절하고 부드럽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최근 여동생의 맞선을 주선, 아이들에게 진짜 이모를 보여줄 생각이다. 
 
필리핀 출신인 결혼 이민 여성인 에스트랄라(31, 경북 상주시 도남동)씨의 집은 민가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있었다.
오후 5시, 에스트랄라씨의 두 딸 혜인(7), 혜선(5)이가 노란 유치원 가방을 메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와 낯선 손님들에게 발랄하게 인사한다.
유치원에서 방금 돌아온 것이다.

“누구세요?”
“왜 왔어요?”
호기심 잔뜩 어린 눈으로 쳐다보면서 언니와 동생이 번갈아 질문을 한다.
오똑한 콧날과 쌍꺼풀이 깊게 진 굵은 눈망울,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이들이다.

첫눈에 에스트랄라씨의 2세들임을 짐작했다. 아이들의 소리를 들었는지 비닐하우스에서 에스트랄라씨와 남편 김점호씨(41)가 나타났다. 에스트랄라씨의 하루 일과는 바쁘고 고단하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식사준비를 한다. 식사를 마치면 설거지를 한 뒤 아이들을 유치원 차에 태워 보낸다. 그리고는 작업복을 갈아입고 하우스로 들어간다. 한번 들어가면 하루 종일 점심식사 시간을 제외하곤 일에 매달린다. 하지만 힘들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같이 있으니까 좋아요. 남편은 힘들다고 조금만 하라고 해요.”

지금은 고생되더라도
땅 갖기 위해 노력할 때

결혼 전에 정밀 철근 계통의 사업을 하던 남편 김씨를 만나 1999년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산에 정착해 살았다. 비교적 넉넉하게 살았는데 2002년 회사가 부도나면서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한국에서 일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식구는 하나 늘었고 두 번째 아이가 뱃속에 있었다. 부부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가 2년 동안 살다가 한국으로 왔다. 상주는 남편의 고향이다. 남편이 먼저 한국으로 와서 고향 인근에 남의 땅을 빌렸다. 이어 에스트랄라씨가 두 딸을 데리고 와서 정착한 것이다. 올해로 결혼 7년차, 부산에서 필리핀으로 또 다시 상주로 짧은 세월 동안 참으로 굴곡이 많았다.

“친구가 한국 남자와 결혼해 서울에 살고 있어요. 그 친구의 권유로 한국으로 시집올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이 많이 망설였습니다.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으로 오면 대부분 유흥업소로 빠진다는 것을 어디서 들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결혼하면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살게 된다고 하니 걱정이 되신 거지요.”

에스트랄라씨는 필리핀에서 가난한 축산농가의 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오리, 닭, 돼지 등을 키우며 어렵게 살고 있다. 3남 5녀의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지만 머리가 좋았다. 그래서 형제들은 가지 못한 대학공부까지 마쳤다.
“이사벨라 스테이트 애니멀 사이언스 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동물과학과라니 한국으로 치면 수의학과와 비슷한 개념이다. 그녀는 우리의 수의사 면허증 같은 자격증을 갖고 있다.
“결혼 전엔 동물들과 살았는데 이젠 식물들과 살아요. 지금은 비록 남의 하우스지만 열심히 일해서 우리만의 하우스를 갖고 싶어요. 매일 노란 오이꽃을 보면서 소원을 빕니다. 빨리 갖게 해달라고요.”

도시로 시집와 농촌에서 살게 된 게 힘들만도 한데 전혀 아니다. 오히려 꽃도 심고 일을 해도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농촌이 좋다고 한다. 다만 하루 빨리 자신의 땅을 갖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을 헤아린 남편이 한마디 거든다.
“이 곳에서 터 잡고 살면 머지않아 자금 지원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우스를 가질 수 있겠지요. 그때까지는 고생이 되더라도 어쩌겠습니까?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요. 여보, 고생돼도 힘냅시다.”

살아보니 한국 사람들
친절하고 부드럽다

비록 안 좋은 기억이 있지만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친절해서 좋다고 한다. 특히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어 그들을 무척 좋아한다.
최근에는 중고 컴퓨터도 한 대 얻었다.

“아직 인터넷 연결은 못 했어요. 돈이 너무 비싸요.”
그래도 아이들은 컴퓨터를 서로 먼저 하려고 싸운다. 취재를 하는 동안에도 아랑곳없이 단순한 게임 속에 빠져 자판을 마구 두들겨 댄다.
주민들과 어울릴 때는 주로 궁금한 것들을 묻는다. 오이농사에 대한 정보도 묻고 생활의 지혜도 얻는다.
그리고 주1회 상주여성회관에서 한국어 교육도 받는다.

집에서 케이블 TV를 보면서도 배우지만 결혼 초에 워낙 한국과 필리핀을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한국어 습득이 좀 늦다. 그곳에서 고국인 필리핀, 태국 등지에서 온 같은 결혼이민자들과 교류도 한다. 아이들은 바로 이웃에 사는 아줌마를 이모라 부른다. 그만큼 두 집은 가까이 지낸다. 에스트랄라씨가 아이들 유치원 문제나 시장보기 등, 여자들에게 물어야 할 일이 있으면 언제나 따듯하게 가르쳐 준다.
많은 도움을 받고 사는데, 그럴 때는 든든한 자매가 부럽지 않다.

“일부이긴 하지만 필리핀 남자들은 여자들을 많이 때려요. 한국 남자들은 그런 게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동생도 머지않아 한국으로 결혼 이민을 옵니다.”
남편의 주선으로 동생이 맞선을 봤다. 머지않아 한국으로 온다면서 벌써부터 부풀어 있다. 아이들에게 진짜 이모가 생기는 것이다.

오이 출하를 할 때면 부부가 같이 나간다. 오붓하게 데이트하는 시간이다. 출하가 끝나면 반드시 들르는 집이 있는데 바로 상주시내에 있는 중국집. 에스트랄라씨가 짬뽕을 유난히 좋아해 꼭 한 그릇씩 해치우고 온다.
“행복합니다. 정말요. 지금은 돈이 없지만 우리 두 사람이 일해서 벌면 됩니다. 미래에는 더 잘 살게 될 거예요.”
집도 작고 누추하다. 아직 내 땅 한 평 가진 것이 없다. 하지만 에스트랄라씨의 행복지수는 높다. 그렇다. 행복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으니까.

김씨는 그런 아내가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많이 미안하다.
“이곳 상주로 와서 최근 2년 동안은 생일도 못 챙겨줬어요.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노곤해서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어느 날 달력을 봤더니 아내 생일이 지나갔더군요. 너무 미안했지만 그 밤에 어디 가서 뭘 하겠습니까? 내년에는 꼭 챙겨줘야지, 다짐하면서 그냥 잤습니다.”
아내 자랑을 부탁했다.

남편이 아내를 보고 빙긋 웃자, 말뜻을 못 알아들은 에스트랄라씨가 큰 눈망울을 꿈벅거린다. “전 보시다시피 가난하고 능력이 없어요. 그런데 아내는 저를 많이 믿고 따라줍니다.
그거 하나에 만족하죠. 아무리 피곤해도 생글거리며 웃는 아내를 보면 하루 피로가 싹 가셔요. 애교도 만점입니다.” <농림부 여성정책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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