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갸거겨...”가갸거겨고교구규...”
지난 10월 9일 한글날 오전 11시 50분. 광주광역시 북구 유동 밀알 희망중학교 교실은 50, 60대 전후의 여성농업인들의 책 읽는 소리로 가득했다.

혼자이거나 두명씩 짝을 지어 앉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또박 또박 한글을 읽어나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따라 들어선 곳은 밀알 희망중학교의 초급반 교실. 이곳에는 이미 자리를 잡은 50여명의 여성농업인들이 수업을 받고 있었다. 학생들은 염색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흰머리가 부질 없어도 마음만은 영락없는 여고생이었다. 한글반, 매화반, 개나리반, 자유반, 우정반, 중학교 예비반 등 교무실 칠판에 적힌 수업일정은 늦게라도 만학의 꽃을 피우려는 향학열을 고스란히 담아 빼곡하기만 했다.
한쪽에선 정영관(75) 교장을 비롯해 선생님들이 다음 수업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밀알 희망중학교의 역사는 4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까지 졸업한 학생만 1만여명에 이르고, 다녀간 선생님들의 수만 해도 3천여명이 넘을 정도로 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이 학교 설립자이기도 한 정영관 교장은 “밀알 희망중학교는 평생 무학의 설움을 안고 살아갈 뻔했던 이들에게 40년째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고 말했다.

한글날을 맞아 무학의 ‘恨’을 풀어주는 조력자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청소년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보금자리로, 지금까지 정영관 교장과 밀알 희망중학교가 걸어온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글 가르쳐주는 희망중학교 최고”

밀알 희망중학교는 지난 1968년 광주광역시를 배경으로 4-H운동을 하던 정영관 교장이 전라남도 화순에서 농촌운동의 일환으로 처음 문을 연 것이 시초다.

정 교장은 “희망중학교는 그 때 당시 농촌에서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청소년들을 선도 교육하기 위해 출발했다”면서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먹고 살기 힘든 시기였지만 그래도 희망은 교육에 있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밀알 희망중학교는 이처럼 청소년들과 특히 여성농업인들에게는 문맹이라는 ‘검은구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통로로 유명하다. 현재 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광주광역시 뿐만 아니라 인근의 나주, 영암, 담양 등 곳곳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학생들이 모이고 있다.

프로그램부터 다양하다. 초급, 중급, 고급 등 자신들의 실력에 맞춰 한글을 배울 수 있고, 원하면 초등학교 학력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검정고시 시험까지 볼 수 있다. 말이 학습이지, 수업은 재미있고 즐겁게 진행된다. 특히 선생님들 역시 밀알 희망중학교 출신이 많아 누구보다 학생들을 이해하고 수준에 맞춰서 운영되고 있다. 학기가 끝나면 발표회도 하고, 간단하게 나마 졸업식도 열린다.

최삼례 사무국장은 “밀알 희망중학교는 대학생 봉사자부터 퇴직 교사, 퇴직 공무원, 희망중학교 졸업생 등이 헌신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면서 “현재도 50여명의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학생들이 주로 고령의 여성들임을 감안해 프로그램은 이들을 먼저 배려한다. 커리큘럼 중에는 가장 기초적인 한글부터 시작해 고급반으로 갈수록 시, 수필 등 문학적인 교재도 많이 활용하고 있다.
40년전에도 그랬지만 반응은 폭발적이다.

인근 우산동에서 다닌다는 오화순(73)씨는 “일단 학교에 오면 말동무도 있고, 재미있는 일도 많이 해주니 너무 좋지. 밥도 주고…”라고 말했다.

또 소용남(70)씨도 “나이 먹으면 자식들한테도 눈치가 보이는데, 글까지 몰랐을 때는 못 배운 안타까움이 더 컸다”고 말했다.

이처럼 밀알 희망중학교는 인기 최고다. 글을 못 배워 한(恨)이 맺힌 여성농업인들이 한을 푸는 곳이기도 하다. 조동남(66)씨는 “요즘에는 시집을 다 읽는다”고 자랑하면서 “까막눈이어서 간판을 봐도 무슨 소리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겠구먼”이라고 말했다.

정 교장은 “한글을 뗀 학생들로부터 직접 쓴 감사편지가 수시로 날아드는데 이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면서 “1년 내내 학교로 전해오는 학생들의 편지만도 엄청난 숫자”고 말했다.

어려움 딛고 희망을 전하기까지…

밀알 희망중학교는 처음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1968년 설립 후 화순 이양에서 능주로, 또 화순읍으로 떠다니기를 수차례. 1981년 광주로 옮겨 북구 유동 삼거리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희망중학교의 이삿짐 꾸리기는 계속됐고 지난 1999년 현재 견물을 임대해 지금까지 수업을 해오고 있다. 광주에서도 임동, 화정동, 계림동 등으로 전전긍긍하다가 현재는 주간반은 북구 누문동 밀알회관에서, 야간반은 계림동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정 교장은 “1968년 건립때부터 양봉, 농장 운영 등을 통해 나오는 수입으로 학교를 운영해왔지만 집세가 없어 쫓겨다닌 횟수만 해도 열손가락이 부족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정규 교육은 내가 안 해도 이미 많이들 하고 있고, 밀알 희망중학교는 다른 이들이 안 하니까, 내가 꼭 해야만 한다”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시작은 했지만 진행 과정에서 어려움도 계속됐다. 교육에 들어가는 교재비, 건물임대료 등이 만만찮았다. 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들 대부분 청소년과 여성들이어서 프로그램을 업그레이드하고, 새로운 내용을 추가해야 했다. 헌신할 수 있는 자원봉사자도 필요했다.

언제부턴가는 학생들이 자치회비도 걷어서 내고, 교사들도 대부분 졸업생들이 자발적으로 봉사를 하면서 인건비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최삼례 사무국장은 “이것도 운영을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기고 봉사도 체질화되더라”면서 “주변의 많은 도움 등을 통해 정착 단계에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또 한미준(37) 선생은 학생들의 연령대가 친정 엄마와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더 열심히 하게 된다”면서 “한글자라도 또박 또박 읽고 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미준씨는 정 교장의 며느리로 결혼과 동시에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정 교장은 “40년동안 학교를 운영하면서 수십만 번 겪은 일이지만 글 모르는 사람들이 글 읽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행복하다”면서 “‘희망’이라는 글자를 종이에 쓰지 못해도 마음에는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끊임없이 가르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정영관 광주 밀알 희망중학교장


4-H 정신 바탕으로 약자 위한 한글교육 실천


광주 밀알 희망중학교의 교육이념은 지(智·Head), 덕(德·Heart), 노(勞·Hands), 체(體·Health) 등 4-H이념에다가 정(情)을 더 했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주인의식을 생활화를 유지하자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제가 고집있게 희망중학교를 꾸려나갈 수 있는 모태가 4-H정신입니다. 4-H는 제가 1세대로 젊은시절부터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희망중학교는 1968년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곁에서 교육을 실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고 과언이 아닙니다.

도둑질한 것도 아닌데 제 때 배우지 못해 남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마음으로는 그분들이 어려운 신문까지 척척 읽어냈으면 합니다만은 어디가서 본인 이름이라도 예쁘게 썼으면 하는 것이 작은 바람입니다.

도시화가 많이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주변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과, 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위한 기관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소히 말하는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거리도 멀지만,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의 거리도 매우 멉니다. 앞으로는 제도권에서의 이들을 위한 다양한 교육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밀알 희망중학교에 오는 학생들은 항상 깨어있으려는 정신자세와 몸을 낮춰 배우려는 자세를 갖춘 분들입니다. ‘문맹’이라는 검은 먹구름에서 벗어나 희망의 등불을 빛을 보시고 싶은 분들은 언제나 찾아오십시오. 문은 항상 열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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