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광기 희생양인가? 희대의 여성 첩보원인가?

  
 
  
 
여명의 눈동자
서기 1905년, 제1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전조와 세기말의 퇴폐가 유럽을 뒤덮고 있을 때였다.
섹시한 무희들의 캉캉 춤으로 유럽의 남성들을 열광시키고 있었던 프랑스 파리의 ‘물랭루즈’ 클럽에는 이즈음 이국적인 풍모의 새로운 스트립댄서가 들어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타 하리’, 인도네시아 말로 ‘여명의 눈동자’라는 뜻이다.

검은 머리와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에 풍만한 육체를 가진 마타 하리의 농염한 춤은 단연 압권으로, 관객들은 조금이라도 앞에서 보려고 클럽이 문을 열기 몇 시간 전부터 장사진을 치곤했다.
난다 긴다 하는 유럽 최고의 댄서들도 보잘 것 없어 보일 정도로 ‘군계일학’이었다. 관객들은 그녀의 춤을 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했고 건강한 남성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녀와의 성적 환타지를 한번 쯤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구야?”
“‘마타 하리’ 라고 새로 들어왔다는 댄서라네.”
“생김새가 이국적이군. 어디 출신이래?”
“발리(인도네시아의 한 지역)에서 왔다던데.”
“발리 섬의 한 왕궁의 공주라는 이야기가 있다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그 나라에서는 고귀한 신분이었다네.”

마타하리는 ‘발리의 왕국에서 온 공주’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왕녀’ ‘동양의 신비를 간직한 천녀’ 등의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그녀 스스로가 퍼뜨린 신비주의 전략이었다. 모계에 인도네시아 피가 섞여 있기에 그녀는 검은 머리에 올리브빛 피부를 가질 수 있었고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지만 실제로 인도네시아에서 산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곳 사정에 밝았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사교클럽에서 인도네시아가 화제에 오르게 되면 그녀는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아름다운 인도네시아의 풍광과 이국적인 풍물을 드라마틱하게 엮어냈다.

만인의 연인
마타 하리(Mata Hari)는 1876년 네덜란드의 레바르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G.M 젤러(Gertrud Margarete Zelle)로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그러나 그녀 나이 13세 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폐인이 돼 술로 소일하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싸웠으며 몇 년이 안 돼 어머니도 죽었다.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된 젤러는 이때부터 여자의 미모가 생존을 위한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청소년 시기에 이미 세미(semi)-‘매춘’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은 군인 장교들이었다. 젤러는 19세가 되던 해에 해군 장교와 결혼했다. 남편이 네덜란드의 식민지 인도네시아 주둔군으로 발령 나자 그녀는 남편을 따라 인도네시아로 건너가게 된다.
결혼 생활은 7년 만에 끝났지만 남편과의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다.

젤러는 1905년 다시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택한 곳은 프랑스였다. 그녀는 이곳에 오면서 댄서로 돈을 벌겠다고 결심한 후 물랭루즈의 문을 두드렸고 그 화려한 데뷔를 했던 것이다. ‘마타 하리’의 탄생이었다.
그녀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이국정취’였다.
가릴 곳만 살짝 가린 섹시하고 격정적인 마타 하리의 발리댄스는 남성들에게 온갖 상상력을 부추기면서 유럽 최고의 섹시아이콘으로 부상한다.

유럽에서 힘깨나 쓴다는 고위 관료와 재력가, 자본가, 군인들이 그녀를 내버려 둘리가 만무했다. 그녀는 오래지 않아 프랑스 사교계의 꽃으로 부상한다.
그녀는 프랑스의 줄르캄프론 장관, 프로이센 황태자, 네덜란드 총리, 브론스위트 백작, 독일군 장교 폰 카데 등 헤아릴 수 없는 정·관계 인사들과 관계를 가졌다.

암울한 세월이여
그러나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1914년 38세가 된 마타하리의 인기와 영광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녀가 관계하던 남성들도 그녀에게 조금씩 시들해져가고 있었다.
그녀에게 열광하던 남성들이 시큰둥해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미친놈들! 언제는 내 발등에 키스만이라도 하게 해 달라고 아우성치던 놈들이….’
마타 하리는 미련 없이 프랑스를 떠나 독일의 베를린으로 향했다. 마타하리는 여기서 독일 고위 경찰과 교제했는데, 그는 마타 하리에게 솔깃한 제안을 하게 된다. 바로 ‘스파이’였다.
적국의 고위급 인사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빼내오면 독일 정부에서 막대한 포상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마타 하리가 이 제안을 수락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러나 마타 하리는 어쨌든 유럽에서는 유명한 여성이었기에(지금의 인기 연예인을 생각하면 된다) 금방 그 동태가 파악되고 말았다.

영국의 정보부에서 독일 첩보계의 고위직과 교제하고 있는 그녀를 스파이로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타 하리가 독일에 온 그해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적국인 독일에 머물 수 없었던 그녀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빈털터리가 된 그녀를 반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이 터져 인심이 흉흉했고 고위급 인사들은 이런저런 불미스런 스캔들에 휘말릴까봐 극도로 몸을 조심하던 때였다.

더구나 영국 정보부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고 있는 마타 하리에게 접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시련과 고독과 배신의 세월이었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찬바람만 휭휭 불고 있었다.

스파이(?) 마타하리
그녀가 다시 프랑스에 돌아온 것은 그녀에게 악재가 됐다.
독일에서 머물다가 전쟁이 터지자 프랑스로 왔다는 사실, 독일 고위급 인사를 만났다는 점은 독일·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 당국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영국은 프랑스로 들어가던 그녀를 붙잡아 3번이나 심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별다른 혐의를 얻어내지 못했고 독일의 정보를 프랑스에 제공하겠다는 그녀의 약속에 방면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 힘겨운 시기를 위로해 주던 프랑스군의 러시아계 공군장교 블라디미르를 사랑하게 된다. 파리에서 일자리를 잃은 그녀는 네덜란드로 돌아갔다가 1915년 12월 애인 블라디미르가 부상으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영국을 거쳐 다시 파리로 가려고 했다. 그녀는 이때 다시 영국 당국에 체포돼 심문을 받았다. 1916년에 재차 영국에 의해 체포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그녀는 1917년에도 다시 영국에 체포돼 프랑스로 넘겨졌다.
그러나 이때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 당국은 그녀가 악명 높은 독일스파이 ‘H-21’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독일인으로부터 돈을 받기는 했지만 간첩 활동이나 정보 제공의 대가는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4년간의 전쟁으로 지칠 대로 지친 유럽사회는, 전쟁의 광기 속에서 인간성의 말단을 드러내고 있던 유럽인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믿으려하지 않았다.

마타 하리는 결국 스파이 혐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사형을 선고받는다. 마녀사냥과도 같았다.
생활고로 인한 베를린 행과 그곳에서 만난 독일인과의 사랑, 그리고 그 독일인의 독배와도 같은 제안은 마타 하리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광기의 희생양
1917년 네덜란드 출신의 독일 여간첩(?) 마타 하리의 처형이 집행된다.
처형장에서의 마타 하리는 모든 것을 초연한 편안한 얼굴이었다고 한다. 마타 하리는 얇은 비단으로 만든 검은 스타킹을 신고 검은색 긴 벨벳 외투를 입고 있었으나 속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었다. 묶이지 않은 채 처형대에 서서 무심하고 태연한 얼굴로 검은 장갑을 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젠 됐다”고 말했다. 12발의 총탄이 41세의 이 가련한 여인의 왼쪽 가슴을 관통했다.

그녀를 만났던 수많은 고위급 인사와 유력자들은 그녀의 죽음에 환호했으리라.
그들의 치부와 온갖 추잡함, 끈끈한 욕망과 부끄러운 과거가 그들이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 씌운 그녀가 모두 가져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미치광이 같던 시절의 희생양, 마녀가 필요했다. 그녀에겐 온갖 소설 같은 혐의와 섹스를 무기로 한 여성스파이로서의 활약상이 보태졌다.

마타 하리가 처형장에서 보여 준 초연하고 관조적인 자세는 어떤 것을 의미했던 것일까?
1999년 비밀이 해제된 영국 정보부(M15)의 ‘제1차 세계대전 관련 문서’에서는 마타 하리의 스파이 활동을 입증할 것이 전혀 없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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