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나?”

  
 
  
 
◇정략 결혼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와 당시 유럽의 최강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상속녀인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사이에서 15번째 자녀인 ‘마리 앙트와네트’가 태어났다.
유럽 최고 왕가의 막내딸 공주는 그야말로 ‘공주처럼’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왕궁의 풍요 속에 묻혀 자라났다.

당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오랜 전쟁 중에 잠깐의 휴전기를 가지고 있었다. 마리의 어머니 테레지아 여왕은 노련한 정략가였다. 그녀는 마리를 프랑스에 시집보내는 정략결혼으로 전쟁을 중단하려고 했다. 1770년, 14살의 마리는 프랑스 왕태자인 루이 16세와 결혼하게 된다.

루이 16세는 한 없이 착한 사람이었다. 그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마리에게 주눅이 들었는지 그녀를 리드하지 못했고 마리 앞에서 수줍어했다. 마리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녀 주위에서 빙빙 돌기만 했을 뿐 아내에게 다가가지 조차 못했다. 부부는 결혼 후 7년간이나 자녀를 갖지 못한다.

◇파티 또 파티
남편에게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마리는 파티를 통해 스트레스를 발산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호화롭고 거대한 왕궁인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의 프티 프리아농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마리가 주최하는 파티와 가면무도회가 열렸다.

마리의 의상, 보석, 악세사리, 장신구 등은 프랑스와 유럽 귀부인들의 유행 아이콘으로 떠 올랐다. 프랑스의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마리 따라하기’가 경쟁처럼 번져갔다.
파티에 소요되는 음식과 와인 만 해도 엄청난 비용이 발생했다.

문제는 마리가 이러한 막대한 돈이 ‘그냥’ ‘저절로’ 생겨나는 것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왕궁 너머 한 블록만 돌아가도 비참하고 궁핍한 삶이 도시 빈민들의 목을 옥죄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서 조차 모르고 있었다.
더 문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아무도 그녀에게 입바른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향의 어머니 테레지아 여왕만이 딸에게 편지를 보내 “생활을 바꾸라”고 질책하고 있었다.

프랑스 민중들은 점차 마리를 공공의 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민중들은 마리를 ‘적자부인’이라며 경멸하기 시작했고 더구나 적국인 오스트리아 출신이기에 증오는 더 해갔다.

프랑스 왕실의 권위도 크게 실추됐다. 그러나 유약하고 사람만 좋은 루이16세는 그저 허허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 자신도 냉혹한 정치현실과는 담을 쌓은 채 사냥과 독서로만 소일하고 있었다.
아무리 풍요로운 프랑스 왕궁이었다 해도 왕실의 재정은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죽음의 목걸이
루이 15세가 죽고 마리의 남편인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랐다. 마리는 이제 명실상부한 프랑스의 국모가 됐으나 여전히 철없는 행동만 거듭했다.

그녀는 잘생긴 유럽의 귀족들과 사귀는 것을 즐겼다. 파티에서 눈 여겨 보았다가 접근하거나 근위병, 호위병들에게도 추파를 던졌다고 한다. 그러나 잠자리에까지 끌어들인다거나 할 정도로 난삽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녀는 늘 멀게만 있는 남편을 대신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잔정을 주고받으며 대리만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남자친구 이상이었던 스웨덴의 ‘페르젠’ 백작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후일 마리가 비참한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녀를 구하고자 마지막까지 고군분투했던 사람이다.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철없는 세월도 서서히 종지부를 향하고 있었다.
민중들의 자각과 근대시민의식의 성숙으로 더 이상 왕실도 귀족도 예전과 같은 ‘무한 지배계층’이 아니었던 것이다.

목걸이 사건은 프랑스 왕실의 몰락을 자초한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왕비가 된 후 남편으로부터 트리아농 궁을 선물로 받은 마리는 인공 연못 공사 및 바닥 공사와 트리아농 궁전 리모델링에 막대한 돈을 투자해 민중들의 분노를 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 모트’라는 귀부인이 ‘로앙’ 대주교에게 “왕비에게 환심을 사려면 그녀가 탐하는 목걸이를 선물 하세요”라고 말한다. “왕비가 540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160만 루블짜리 목걸이를 욕심내고 있다”고 한 것이다. 평소 마리의 환심을 사지 못해 안달이 나 있던 로앙 대주교는 목걸이를 사기로 하고 대금의 일부를 지급했다.

그러나 목걸이는 마리 앙트와네트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도중에 없어져 버렸다. 보석상은 지불일이 되도 돈을 받지 못하자 마리를 찾아가 일렀고 마리는 대주교를 불러 엄청나게 욕을 퍼부었다. 대주교는 망신스럽게도 재판정에까지 오르게 됐고 사기꾼 라 모트 부인은 국외로 추방됐다.
이 사건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 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전 프랑스로 퍼져나가 마리의 사치와 향락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혁명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
1789년, 프랑스 국민들이 일어섰다. 악명 높은 바스티유 감옥에 갇혀 있던 무고한 죄수들을 위한 행진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왕과 귀족들에 대한 근대 시민들, 신흥 경제인들의 도전 양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즉, 체제전복이었다.

처음에는 도시빈민들의 분노로 시작됐던 혁명의 물결은 지식인과 부르주아 계급에까지 확산됐다. 왕실과 귀족들은 그 동안의 사치와 방만 그리고 무지에 대한 죄 값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나 왕과 왕비, 유력 귀족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즈음에서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민중들의 요구를 반영했더라면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왕과 왕실에 대한 막연한 존경심과 두려움이 민중들의 마음속에는 존재했던 것이다.
왕과 왕비는 민중들에게 사죄하는 대신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여 혁명을 진압하려 했다. 이 사실은 민중들을 더욱 자극해 그들에게 어떠한 자비도 바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혁명군은 신속하게 프랑스를 장악해 나갔고 베르사유 궁전도 이내 혁명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마리는 남편과 자녀와 함께 튈르리 궁전에 갇혔다. 마리는 감추어 둔 보석들을 팔거나 저당 잡혀 마련한 돈으로 오스트리아와 연락을 취하며 자기들을 탈출시켜 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그녀의 연인 페르센 백작은 다른 사람 명의의 위조 여권을 만들어 마리에게 전달했다. 마리는 탈출과정에서도 바보같은 실수를 범하고 만다.

페르센의 도움으로 준비한 마차 안에는 온갖 사치품과 식량과 술과 옷이 가득했던 것이다. 시녀와 미용사까지 동반한 대형마차는 누가 봐도 이상했다. 그저 평범한 마차가 아니라는 것은 어떤 병사도 알아챌 수 있었다. 화려한(?) 탈출 행렬은 곧 발각되고 그들 가족은 그 해 8월 13일 ‘탕플’감옥에 투옥되는 신세로 전락한다.

◇종말
1792년 혁명의 주도세력이 급진적이고 과격한 정당으로 넘어가자 마리의 가족에게는 암운이 드리운다. 이즈음 마리가 그녀의 친정 오빠인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2세에게 혁명군을 진압할 군대를 요청했다는 사실도 알려지면서 여론은 마리를 프랑스 국민들을 죽이기 위해 온 마녀로까지 몰아세운다. 1793년 1월 21일에 남편 루이 16세가 먼저 처형됐다. 그 해 여름 마리는 왕태자 루이와 헤어져야 했다. 각각 연금되게 된 것이다.

이감과 공개재판을 여러 번 거친 1793년 10월 16일,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백발이 되어버린 흉한 몰골의 마리 앙트와네트는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끌려왔다. 군중들의 욕설과 고함소리 속에 그녀는 머리를 단두대 속에 들이밀었다. 성난 군중들은 마음껏 조롱하고 저주하고 소리 질러 댔다.
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마리는 생각했을 것이다.

언젠가 어느 하인이 “민중들은 먹을 빵이 없어요”라고 하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했던 무지했던 자신을, 보석이며 화려한 의상이며 왕궁의 샹들리에며 기름진 음식과 최고급 와인이며 자신의 옆에 오기 위해 온갖 아양과 찬사를 늘어놓던 귀족과 귀부인들이며… 이 모든 것들의 공허함을.
마리 앙트와네트는 민중들의 삶을 너무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철부지였기에 비참한 죽음을 당해야 했다. 왕과 왕비의 무지는 결국 큰 죄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