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베인 알뜰·검소로 중앙회 살림 ‘단속’

  
 
  
 
봄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지난 13일 부산 강서구에 위치한 강연순(59) 생활개선중앙회 감사를 찾았다. 봄비 탓인지 안개 속에 쌓인 부산은 봄을 알리는 푸른 빛이 완연했다.
음식점 운영으로 바쁜 점심시간에도 불구하고 반갑게 기자를 맞은 강 감사는 똑부러진 경영철학과 생활개선회 활동 방향을 피력했다.

“회계, 업무 및 정관, 감사위원회 규정 등 생활개선회 전반에 관한 관리 감독을 해야하는 감사의 역할이 기대되면서도 조금은 걱정된다”는 강 감사에게서 생활개선회 활동방향과 그녀의 지난 삶의 이이야기를 들어봤다.



“야문 사람이 최곱미더~”
강연순 생활개선중앙회 감사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2동에서 남편 최갑선(63)씨와 함께 농사를 짓고 청둥오리 전문점 ‘초원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

경남 남해가 고향인 그녀는 23살 때 직장 동료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편의 첫인상부터 어딘지 모를 순한 인상이 마음에 들었다는 그녀는 본인이 급한 성격이라 평소 차분한 사람을 원했다.

“남편과 선을 보고 철학관을 갔었는데 저는 손끝에 돈이 묻어 있어서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고 했어요. 또 남편은 경상도 말로 야문(단단한) 사람이니 꼭 결혼하라고 했어요.”
운전을 못하는 그녀에게 평생기사가 돼주겠다는 약속을 한 남편은 결혼하고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변함없이 그녀의 ‘발’이 돼주고 있다.

“많은 사회활동에도 싫은 소리 한 마디 없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남편이 너무 고마워요. 또 올 해는 대학 공부까지 시켜줘서… 세상에 이런 남편 없는 것 같아요.”

얼마 전 부산여대 아동복지학과 교수에게서 ‘경상도 남자들의 사랑한단 말’에 대한 반응을 조사해 오라는 레포트를 받았다는 그녀는 남편에게 하루에 세 번 씩 사랑한단 말을 할 생각인데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안 봐도 뻔하다며 크게 웃었다.

단합은 생활개선회가 최고!
그녀는 대저2동 부녀회장을 하던 중 부녀회가 생활개선회구락부로 자동으로 편입되면서 지금까지 17년째 생활개선회를 하고 있다.

그녀가 대저2동에서 생활개선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 회원은 8명이었다. 하지만 공항지구회장을 맡을 당시에는 80명까지 활성화시키고 미역, 참기름 등을 판매한 600만원을 다음 회장단에 넘겨주는 등 꾸준히 발전 시켰다.
또 생활개선회 활동을 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묻자 쌀 1500kg을 모아서 보육시설과 장애우 도왔던 일, 된장·간장 담궈 독거노인 도왔던 일, 소비자 대상 대규모 봄나물 축제 등을 꼽았다.

“봄나물축제 첫 해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왔었어요. 부산시회장을 할 때 1회, 2회 축제를 개최했는데 음식파느라 바쁘게 뛰어다니고, 각 지구에 수익금 나눠줄 때 그 기쁨을 말로 설명할 수 없었어요.”
또한 그녀는 30년 동안 새마을부녀회, 자연보호 등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쳐왔지만 지금 나이에 생활개선회라는 학습단체 안에서 한 가지라도 배울 수 있어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생활개선회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들 보면 안타까워요.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것만이 앞서가는 여성이 되는 길이거든요.”
올 해 처음으로 생활개선중앙회 감사직을 맡은 그녀는 멋진 생활개선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후회 없는 삶 위해 하루하루 최선
그녀는 최근 왼쪽 손목 인대 파열로 4급 장애 판정을 받았다.
15년전쯤 음식점과 토마토농사를 동시에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둘 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토마토 모종을 끌고 일꾼들한테 갖다 주려다가 다친 그녀는 왼쪽 손목의 인대가 끊어졌다. 괜찮을 것 같아 꾹 참고 6년 정도 지난 후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그 땐 이미 관절 대부분이 녹은 상태였다.

그녀는 골반뼈를 떼서 손목에 이식하는 수술을 받은 후 토마토 농사는 그만 뒀다. 그 후 손목을 편하게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몸은 아팠지만 후회는 않해요. 내가 너무 열심히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고 그런 모습을 보고 애들이 남 못지않게 착하게 자랐거든요.”
“또 지금은 아프지도 않고 다행히 다리가 아니니까 남이 보기에도 괜찮고 일 하는데도 지장이 없어요.”

만학의 꿈 이루다
“배움의 끝은 없는 것 같아요.”
그녀가 어린 시절에는 한국전쟁 이후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사는 시기였다. 또 학교라는 것은 아예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없는 살림에도 어머니의 노력으로 중학교까지만 학교를 다녔다.
“생활개선회장 선거 이력서를 쓰는데 옆에서 중학교만 나왔냐는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자존심이 상해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몰라요.”

그날 그녀는 곧바로 부경보건고등학교 성인반에 지원, 입학해 올 해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큰딸, 여동생과 함께 부산여자대학 아동복지교육과에 당당히 입학했다.

“아동복지교육과는 내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음에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면서 “내 손자 키우는 마음으로 젊은 농촌여성들이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기고 농사나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학업의 꿈을 이어가고 있는 그녀는 곧 다가올 대학생활 첫 시험 때문에 설레인다.

알뜰함이 나의 재산
그녀는 결혼 후 오직 알뜰하게 사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애들한테는 엄마가 거울이잖아요. 검소하고 알뜰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늘 가르치고 실천하려 했어요.”

그녀는 자존심 강한 만큼, 몸이 힘들어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
“장애가 생긴지도 모를 정도로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는 그녀는 그렇게 안했으면 세상을 이겨낼 수 없었다고 한다.
특유의 알뜰함과 단단함으로 살고 있는 그녀에게서 생활개선회의 표상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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