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4월에 구덩이를 팠습니다.
소 거름 돼지 거름 한 삽씩 얻어다가 내 팔꿈치만큼 깊은
구덩이 속에 세 개의 씨앗을 묻었습니다.

흙무덤 속 호박씨는
여자가 되기 위해, 어머니가 되겠다고
꼭꼭 밟은 땅 위로 싹을 애써 틔워냅니다.

아침 이슬 뒤 노랗게 우산 꽃으로 핀 호박꽃
낯가림 않고 어디에나 줄기 뻗어
억척스런 삶을 살면서도 꿀내음 솔솔 불거진 꽃술 위로

벌 나비 배불려 주고
생명 잉태하는 모성스런 어머니 꽃입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가족을 위해
들에서 달구어진 몸으로 지쳐 있을 때
입맛이 없는 여름 점심에 새파랗게 찐 호박잎에
된장 몇 술 찍어 호박쌈으로
훌륭한 반찬이 되어 가족에게 힘을 줍니다.

옆 논에는 서툰 생가래질에 질펀히 담긴 무논에
도회지에서 이사 온 귀농의 모가 자랍니다.

저녁바람으로 호박은 논으로 마실을 갑니다.
먼저 온 개구리가 어찌나 혼자서
이 마을 저 마을 이야기로 떠들던지

도시의 힘든 생활에 지쳐서 귀농한 어린 모를
호박은 위로하며 더불어 살아보자고 합니다.
호박은 해마다 듣는 이야기이지만
오늘보다는 내일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설 수 있고 정직한 생활이 농촌의
삶이라고 말입니다.

밤새 나눈 이웃의 걱정은 평상에 누워서
하늘을 천장으로 호박 부침개를 부쳐 이웃의
정을 나눕니다.
간간이 짠맛이 나는 바다 생각도 여름이 주고 간
선물입니다.

갈치를 사다가 덤성덤성 썰어 넣은 풋호박에
매운 고추 두어 서너 개
내 땅에서 나온 마늘 한 통
꼭꼭 찧어서
갈치국을 끓여내면 들에서 돌아오는
남편의 콧노래가 멀리서부터 들립니다.

처서를 보낸 뒤
뒹굴어져 있는 누렁이 호박을 조심스레 안고 오시는 어머니
벌써부터 시누이 걱정입니다.

요즘 그 아이 몸이 안 좋아 보이던데…
주고 싶다는 말보다 푸념만 하십니다.
누룽이 호박 하나 서울 딸집으로 도장이 찍히고,
또하나 누룽이 호박은 우리 딸 오는 동짓날 팥죽에 넣어
맛있게 먹일 것이고

겨울 긴 밤 깎아서 말랭이로 봄나물로 준비하고
채로 다듬어 겨울에 고향 오시는 손님상에 올립니다.

여름 내내 뙤약볕에서 가족을 지키고 농촌을 사랑하는
그리고 언제나 쓰임이 있는
항상 새날을 준비하는 아내와 며느리의 이름으로
가장 큰 어머니로 서기 위한 나는 호박이었습니다.


정 영 순 (마산시생활개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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