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중국 태동의 ‘우먼파워’ 애령·경령·미령 자매

  
 
  
 
오랜 금기를 넘어
송가수(宋嘉樹)는 청나라 말기, 상하이(上海)지역의 유력자이자 엄청난 재산가로 봉건주의의 낡은 관행을 싫어했던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애령, 경령, 미령이라는 세 딸이 있었다.
“전족(纏足) 따위의 못된 풍습이 아직도 횡행하고 있다니 우리 중국 인민들은 언제나 우매함에서 벗어나 현대적 시민의식을 가지게 될까?”

“너희들은 비록 여자이나 끝까지 공부시키겠다. 이제 세월이 바뀌었다. 여자도 능력이 있다면 국가와 인민을 위해서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애령, 경령, 미령에게 송가수는 아버지를 넘어 혁명적 사고와 선구자적 여성관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그는 아들, 딸 가리지 않고 자식교육에 매진했다.

큰 딸 애령이 13세가 되자 송가수는 당시 중국사회에서 상상키 어려웠던 ‘딸자식 해외유학’을 결심한다. 이렇게 송애령은 중국인여성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다.
송가수는 현재 중국이나 대만 모두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손문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사상, 철학, 이념을 함께하는 혁명동지였다.

1890년부터 1910년대 초의 어지러웠던 중국. 중국을 지배하던 만주족의 청나라는 서태후 시절의 실정(失政)을 거치며 국력이 쇄약해져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에 국토의 여기저기를 물어 뜯겨 왕조의 몰락만을 기다리는 ‘아시아의 병자(病者)’로 전락해 있었다.

이 때 일어선 손문(1866~1925)은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주창하며 반청운동(反淸運動)을 주도했던 지식인이자 혁명가로, 봉건주의를 타도하고 인민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되자는 공화제를 꿈꿨던 사람이다. 그에게 크게 매료된 송가수는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손문을 스승으로 생각할 만치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령이 손문과?”
“뭐라고? 네가 중산(中山)선생(손문의 호)과 결혼하겠다고?” 송가수는 기가 막혔다. 경령이 그와 결혼하겠다는 것이다.
“그 사람 나이를 네가 모르느냐? 너랑 거의 30년 차이나는 아버지 연배의 사람이란 말이다. 게다가 그와 결혼한다면 후처가 되는 것 아니더냐?”

‘존경하는 중산과 이 무슨 악연이란 말인가?’ 송가수는 결사반대했지만, 경령의 고집이라면 결혼을 강행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크게 낙담했다.

1892년 1월에 태어난 둘째 딸 경령은 성격이 침착하고 수줍음을 많이 탔다. 그러나 의외로 옹골찬 구석이 있어 독립심이 강하고 진보적이며 객관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냉철함을 갖춘 딸이었다. 1913년 미국 조지니아주 웨슬리 여자 대학을 졸업한 경령은 1914년 아버지의 동지이자 사상적 스승인 손문의 비서로 들어가 그의 혁명활동에 그림자 역할을 했다.

경령은 손문의 저작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번역가이자 외국인들과의 중요한 만남에서 통역사 역할을 하며 손문을 도왔다. 경령은 손문의 비서생활을 하면서 그의 삼민주의 사상에 크나 큰 감명을 받았고, 그에 대한 존경은 사랑의 감정으로 까지 이어졌다.

1915년 10월 25일, 경령은 일본 도쿄에서 손문과 결혼한다. 손문은 재혼이었다. 10년간의 결혼생활은 경령이 중국인민의 위대한 여성지도자로 탈바꿈하는 학습과 정진(精進)의 시기이기도 했다. 손문의 최측근에서 그의 사상과 민족애를 지켜봤던 경령은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현대중국 탄생의 어머니가 된다.

대척점(對蹠點)
막내 미령(1901~2003)은 활달하고 쾌활했다. 언니 경령과 8살 차이나는 막내딸이니 귀여움을 독차지 한 철부지 부잣집 막내딸이었음직하다.
미령 역시 미국 웨슬리 대학을 졸업했다. 유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있던 미령은 이따금 형부인 손문의 집에 놀러가 언니를 만나곤 했는데, 당시 국민당 장교였던 장개석(장졔스; 1887~1975)은 손문의 휘하에 있었기에 그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고, 여기서 아름다운 미령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 미령도 장개석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장개석은 일본 유학 후 중국에 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온 열혈청년이었다. 그의 목표는 청나라의 만주족을 몰아내는 것으로 1918년 손문의 참모로 들어가면서 국민당의 실력자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장개석은 손문에게 미령과의 결혼을 주선해 주길 원했다. 그러나 손문은 아내 송경령이 “송미령이 죽는 것을 볼지언정 장개석과 결혼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고 했을 정도로 장개석을 꺼려해 결혼 주선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중국의 공산주의자들 중 다수가 국민당에 포진하고 있었는데 장개석은 공산주의자들을 극도로 싫어해 국민당 내에 갈등이 커지고 있었다. 송경령은 장개석의 강경한 태도가 국민당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것이 민족 분열로 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해 그를 미워했던 것이다.

1925년 손문이 죽자 장개석의 힘은 더 커졌다. 그는 1927년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했고 그해 12월 1일, 송미령은 기어이 장개석과 결혼식을 올렸다.

손문의 뒤를 이은 송경령과 장개석의 국민당은 완전히 갈라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두 자매에 비해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맏언니 송애령은 두 자매의 중간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을 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찌감치 중국 북부의 거부(巨富) 공상희와 결혼한 송애령은 “막대한 부를 지닌 우리 집안에 손문과 같은 정신적 지주에, 막강한 무력을 지닌 장개석이 합류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다. 현실감각이 투철했던 여인이었다.

송애령의 남편 공상희는 후에 국민당 정부의 재정 후원가로 활약했으며 1928~45년까지 중국 국민정부의 요직을 맡았던 은행가이자 사업가였다.

자매들의 분투
1927년 장개석의 쿠데타 이후,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를 ‘국공내전’이라 한다)으로 치닫게 됐다. 장개석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본토를 침략해 들어온 일본과도 싸워야 했다. 미령은 장개석의 모든 전투를 따라다녔다. 중국 전역에 미령의 발자취가 닫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장개석을 헌신적으로 보좌했다. 서양 신지식으로 무장한 그녀는 외교관으로, 비서로, 참모로, 장개석의 휴식처로 그의 분신처럼 활약했다.

한편, 송경령은 지주와 상인, 자본가들과 밀착하는 대신 중국 인민의 대다수인 농민들과 소원했던 국민당의 노선에 반발, 공산당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활약하고 있었다. 그녀로 인해 공산당은 손문의 정통 후임자임을 자처할 수 있었고, 농민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간 공산당은 아직 세력이 미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중국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해 나가고 있었다.

경령은 장개석이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했을 때, “그것은 손문의 정신을 배반한 것”이라고 선언하고 소련으로 2년간 망명했다가 돌아온 후 줄곧 반(反) 장개석 노선을 견지했던 것이다.

송경령은 사회주의라는 이념보다는 농민들을 위한 사회복지 활동 자체에 관심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은 세력을 넓히기 시작해 드디어 1949년 장개석의 국민당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그래요? 미령이 미국을 떠나 대만으로 건너갔다는 말이지요?”
공화국 수립 얼마 후, 쓰러져가는 국민당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고자 미국으로 건너갔던 미령이 대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령은 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매들, 그 후
경령은 대륙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 기여하며 중국 인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미령은 대만으로 밀려난 장개석과 함께 대만 국민당 시대를 열었고, 그들의 시대는 1990년대까지 지속됐다.
경령은 손문 정신의 진정한 계승자로 추앙받으며 현대 중국 정부(공산당)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1981년 중국정부는 그녀를 ‘인민공화국 명예의장’에 추서했다. 미령은 103세까지 장수하며 손문의 국민당 창건과 장개석 국민당의 패배, 대만에서의 건국과 대만 고도성장기의 퍼스트레이디, 선거패배로 인한 국민당의 몰락 등을 지켜 본 현대 중국 역사의 살아있는 전설로 기억된다.

맏언니 애령은 국민당의 패배가 임박한 1948년 남편 공상희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해 거기서 생을 보냈다.
송가의 세자매는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탄생한 현대중국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던 여인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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