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가경영주’는 남성 몫, 여성도 ‘전문인’ 대우 절실

경남 산청군 신안면 외고리에서 남편과 함께 딸기 농사를 짓는 김정순(44.여)씨는 4년 전 ‘밭일’에서 은퇴했다. 허리가 너무 아파 찾은 병원에서 “척추가 상해 보형물을 넣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수술 대신 ‘현장 은퇴’를 택한 것.

김씨는 “1988년 산청에 시집 온 뒤 밭일하랴, 살림하랴, 아이들 키우랴 잠시도 허리를 못 펴는 생활을 계속하다보니 탈이 난 모양”이라면서 “수술이 겁나 허리 굽히는 일은 더 못 하고,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거들고 있다”고 말했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옥산면에서 고추와 딸기 농사를 짓는 김은심(34.여)씨는 피아노를 치는 큰 딸(11)을 볼 때마다 ‘학원 찾아 삼만리’ 소동을 벌였던 3년전 일을생각할 때마다 피식 웃음이 난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졸라 당시 인근 면까지나가 겨우 학원을 찾아냈지만, “너무 멀어 학원버스를 보내줄 수 없다”는 말과 함께 학원 등록을 거절당한 것.
김씨 딸의 소원은 1년 후 집 근처에 피아노 학원이 생긴 후에야 이뤄졌다.

세 딸의 엄마인 김씨는 “큰 애가 결국 피아노를 치게 된 건 다행이지만, 앞으로 아이들이 커나가면서 또 어떤 ‘장벽’에 부딪힐지 걱정”이라며 “농촌 아이들도 배우고 싶은 것을 마음껏 배울 수 있도록 교육시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요즘 우리사회에서는 최고경영자(CEO)와 전투기 조종사에서 총리까지, 한때 금녀(禁女)의 영역이었던 곳에도 여성들이 속속 진출해 성공 행진을 이어가면서 ‘여풍(女風)’으로 시끄럽지만, 농촌여성들에게는 아직 ‘남의 얘기’다.

살림과 육아, 자녀 교육, 시부모 봉양에 농사일까지 도맡아 해 내는 ‘슈퍼우먼’이면서도 정작 본인 명의의 밭 한 뙈기도 갖기 힘든 것이 현실인 것이다.
 
■ 농촌의 절반은 여성…경영주는 18% 불과

통계청의 농업기본통계조사에 따르면 2008년 기준 농촌 여성은 164만5천명으로, 전체 농촌인구(318만7천명)의 절반 이상(51.6%)이상을 차지한다.

그 중에서도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농업주종사인구’ 가운데 여성의 수는 101만7천명(53.3%)으로 역시 절반을 넘어선다.

여기다 농촌 여성의 절반 가량(43.6%)은 집안 농사일의 절반 이상을 부담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2008년 여성농업인 실태조사)

하지만 농가의 ‘경영주’로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 여성은 전체 농장주(121만2천명)의 1/5에도 못 미치는 21만7천명(17.9%)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여성이 본인 명의의 농지를 갖지 못한 채 남편 앞으로 등록된 논밭에서 일을 하기 때문이다.
농협 조합원 수에서도 여성은 밀린다.

2008년 당시 전체 농협 조합원 중 여성 비율은 29.0%에 불과했으며, 여성 대의원의 수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14%(1만165명)에 그쳤다.

여성 임원 수는 전체의 5%에도 못 미치는 4.0%(359명)였다.
농가주부모임 전국연합회 최애순(51) 회장은 “농협 조합원이 되려면 100만원 가량의 출자금을 내야 하는데, 경제권이 없는 농촌 여성들에게는 큰 부담이어서 선뜻 조합에 가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농촌 여성을 힘들게 하는 것

“아이 낳고 1년을 쉬는데 말 그대로 바늘방석이었어요. 내가 쉬면 우리집 수입이 줄어드니까요”
충남 부여에서 오이.멜론 농사를 짓는 황우정(35.여)씨는 “여성 농민으로서 제일 힘든점이 뭐냐”고 묻는 기자에게 “출산.육아 문제가 만만치 않다”고 답했다.

도시 직장 여성이야 출산하면 유급휴가를 갈 수 있지만, 농촌 여성들은 “내가 쉬면 수입이 준다”는 생각에 마음껏 쉬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것도 문제다. 황씨가 사는 부여군의 경우 영.유아 전문 어린이집이 단 한 곳밖에 없다. 어린이집이 있는 부여읍 쌍북리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은 아이를 맡기기조차 힘들다.
황씨는 “주변 엄마들을 보면 애 맡길 곳이 없어 학원을 알아보곤 하는데, 적당한 학원 찾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면서 “농사짓느라 애를 방치하는 것 같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의 김황경산 정책국장은 대부분의 농촌 여성들이 ‘농업인’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현행 농어업.농어촌 및 식품산업기본법에 따르면 농업인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1천㎡(300평) 이상 농지를 경영 또는 경작하거나 ▲농업을 통해 연간 120만원 이상의 농산물 판매 수익을 올리거나 ▲1년 중 90일 이상 농업에 종사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농촌 여성은 남편 소유의 농장에서 ‘비공식적으로’ 일하고 수입도 따로 관리하지 않기 때문에 농업인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정책자금 대출부터 작목반 가입, 사고시 피해보상 문제까지 많은 부분에서 불이익을 감수하고 살고 있다.

농가주부모임의 최애순 회장은 농촌 여성을 위한 ‘멘토’가 없다는 점을 가장 아쉬워했다. 육아나 자녀교육 말고도 농촌 여성이기 때문에 느끼는 고립감과 막막함, 경제적 어려움 등을 해결해 줄 만한 전문가나 전문기관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 “우리도 전문 농업인”, 지원책.인식 변화 절실

전국 자치단체들은 저마다 농촌 여성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내놓고 있다.
충남도는 여성 농.어업인이 출산할 경우 최장 45일

간 하루 3만5천원(자부담 7천원)씩의 영농비를 지원하는 ‘농가도우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농지소유면적이 5㏊이하이고 농업외 소득이 연 3천700만원 이하인 농업인의 만5세 이하 자녀에게 보육료를 지원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전북도와 경북도 역시 출산 후 40〜60일 가량 일 3〜4만원(10% 자부담)의 영농비를 지원하는 등 다른 자치단체도 사정은 비슷하다.

전국 각지에는 또 정부가 민간에 위탁해 운영하는 ‘여성 농.어업인 센터’ 38개소가 설치돼 있다.
이곳에서는 농촌 아이들의 보육과 교육, 여성 농업인 교육.상담을 한다.
하지만 이 센터도 지역별 편중이 심한데다, 농가도우미제도 역시 지원 기간이 짧고 액수도 적어 실질적인 도움은 못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애순 회장은 “민간 보육시설이나 학원은 수입을 따져 시골에는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여성센터는 농촌 여성들에겐 구세주나 마찬가지”라면서 “오지까지 여성센터가 들어설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노력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농촌 여성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여성 농업인들은 한결같이 “우리를 전문 농업인으로 인정해달라”고 입을 모은다.

최 회장은 “농촌 여성을 그냥 ‘주부’, 혹은 농사일을 돕는 ‘보조적인 존재’가 아닌 독립적인 직업인으로 인정해주면 많은 것이 해결된다”며 “결국 중요한 것은 인식의 문제”라고 말했다.
충남의 황우정씨도 “여성이 정책자금을 신청하러 가면 ‘오죽하면 여자가 왔냐’는 반응을 보이는 공무원이 아직 있는 게 현실”이라며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직업인으로 인정해줘야 농촌 여성의 발언권도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농가주부모임 강원도연합회의 성연모 회장(57)은 좀더 ‘섬세한 정책’을 주문했다.
성 회장은 “남편과 사별하고 3년째 혼자 농사를 짓는데 여간 힘든게 아니다”면서 “여성농업인들이 트랙터 같은 농기계 사용법도 배우고, 쉽게 빌릴 수 있도록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농촌 여성의 ‘각성’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있다.
최 회장은 “여성들도 정부나 지자체에서 시행 중인 정책이 뭔지, 농촌 여성의 문제는 뭐고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요즘은 한 분야에서 10년만 일해도 전문가라지 않나”라면서 “10년, 20년 농사를 지은 농촌 여성들도 조금만 노력하면 경쟁력을 갖고 농산물 가공 등 분야에서는 경제적 자립도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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