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인 절반 이상 ‘농부증’, 비닐하우스 증후군에 안전사고도

전남 담양군 금성면에 사는 추선자(75.가명)씨는 37살에 폐경이 왔다.
추씨는 무릎이 아파 먹은 약이 잘못된 탓으로 믿고 있다. 추씨는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없어서 약이라도 꼬박꼬박 먹었는데, 나중엔 독한 성분 때문에 복용이 금지돼 더는 구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젊어서부터 농사밖에 모르고 산 추씨.고령임에도 쉬기는 커녕 무릎을 구부리지 못해 앉지도 못하고 엉덩이를 든 채 일을 하고 있다. 허리는 휘어 바지가 흘러내릴 정도다. 추씨처럼 저마다 고질병 한 두가지씩 안고 사는 농민들로서는 경제적 부담과 농사일 때문에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논으로, 밭으로 나간다.
 
■ “농업들은 아프다”
지난 잘 29일 오전 전남 담양군 금성면 외추 보건진료소. 농촌 보건진료소는 주민들에게 ‘종합병원’이자 ‘사랑방’이다.

이곳에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 3명이 차례대로 물리치료를 받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송연말(67.여)씨는 1주일에 2~3번 진료소를 찾고, 매주 금요일이면 요양보호사의 차를 타고 군 보건소로 간다.

농사일을 하지 못하게 된 송씨는 좀 더 일찍 건강을 관리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원망스럽다.
이 진료소에서 혼자 근무하며 230가구 600여명 주민의 건강을 돌보는 박영숙(56.여) 소장.

그녀는 감기에서 근골격계 질환까지 병명도 다양한 환자를 맞고, 상담 전화도 받고, 오후에는 진료소까지 걸어오기 어려운 주민을 찾아다니느라 쉴 틈이 없다. 진료소가 아니더라도 논.밭에서 만난 농민들은 “아픈 곳이 있느냐”는 물음에 “전국(온몸)이 아프다. 대한민국이 아프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농부증, 농약중독, 비닐하우스 증후군, 농기계 사고는 농민 건강을 위협하는 4대 요인으로 꼽힌다.
이 가운데 어깨결림, 손발 저림 등 증세로 나타나는 농부증은 절반 이상의 농민을 괴롭히고 있다.

통계청이 2008년 전국 읍·면 단위 농산어촌 지역 2천8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농림어업인의 21.7%가 ‘농부증을 항상 앓고 있다’고 답했으며 24.9%는 ‘의증(의심증세)이 있다’고 답했다.

집약적 생산체제인 국내 농업 특성과 인력감소 등으로 농약 사용량이 늘면서 농약 중독 사례도 증가했지만 정확한 실태 파악 조차 기대하기 힘들만큼 관련 연구는 미흡하다.


하우스 속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좁은 공간에서 반복작업, 하우스 안팎의 온도 차에 따른 면역력 약화로 비닐하우스 증후군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파종기나 수확철 마음이 급한 농민에게는 농기계로 인한 끼임, 신체절단 사고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 “농업인들은 아파도 참는다”
‘치료비가 많이 든다(41.8%), 의료기관이 멀다(24.3%), 환자를 돌볼 사람이 없다(19.6%), 의료서비스 질이 낮다(11.6%), 기타(1.4%)’.
2008년 통계청 조사에서 농림어업인이 꼽은 질병치료 시 애로사항이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농민에게는 의원급 병원 기본 진료비와 왕복 버스비 5천원도 부담스럽다.
더욱이 읍·면 소재지에 가려면 2~3시간 간격으로 다니는 버스를 타야 돼 농민들은 약국 가는데만 한나절 일을 포기해야 한다.

지난 달 28일 오후 전남 나주시 이창동 농민약국에는 이옥례(85.여)씨가 한 달치 혈압약 봉지를 들고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나주시 왕곡면에 사는 이씨는 이날 오전 병원에 들렀다가 약을 받아 귀가하려 했지만 낮 12시 5분 집으로 가는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이씨는 3시간을 약국에서 보내면서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듯 “약국이 내 집 같다”고 말했다.
시설 부족은 병원에서도 두드러진다.

지난해 말 현재 응급의료기관이 없는 곳은 경북 10개군, 전남과 강원 각각 6개군, 경남.전북 각각 5개군, 충남 4개군, 경기.충북.제주 각각 2개군, 인천 1개군 등 전국 43개 군이나 됐다.
그나마 있는 병원들도 농촌에서 돈벌이가 되는 내과, 정형외과 등으로 쏠림현상이 심하다.

전국 40개 군에는 산부인과가 없으며 8개 군에서는 분만을 할 수 없다.
48개 군에서는 병원에서 신생아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셈이다.

농민약국 이연임 약사는 “마을진료를 다니다 보면 아파도 그냥 마을회관에 앉아있는 분들이 많다”며 “의료기관을 두고도 돈이 없거나 교통이 불편해서, 또는 농사일에 바빠서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 “보건소라도 편하게 다녔으면...”
농촌 의료 문제 해결의 본질은 공공보건 강화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IMF 이후 구조조정으로 1999년 초 2천34개였던 보건진료소는 1년여 만에 1천926개로 줄어 이후 큰 변동 없이 유지되고 있다.

의학전문대학원제 도입, 여성 의료인 증가로 공중보건의 수가 줄면서 보건지소는 구인난을 호소하고 있다.

농촌 보건의료정책은 시설, 장비 확충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공공의료 최전선인 보건소와 보건지소의 인력을 늘려 방문 검진, 교육 등을 강화하는 것이 더 급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농민들은 의료시설을 실질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교통 지원을 확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농민 배삼석(57)씨는 “나는 경운기라도 타고 다닐 수 있지만, 연세가 많은 농민에게는 필요할 때 외출하는 자체가 모험”이라며 “마을버스나 택시를 더 손쉽게 이용하도록 자치단체가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근 발의된 농업노동재해보험법은 농촌 의료 현실 개선에 큰 몫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법안은 노동자들의 산재 보험처럼 농사지으면서 발생하는 사고성 재해와 직업성 질환에 대한 치료비, 생계비를 지원하는 내용이다.

한나라당 황영철, 민주당 김우남, 민노당 강기갑 의원이 지난해 말 대표 발의해 국회 상정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이 법의 법제화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돼 있는 반면, 연간 수천억원에 달하는 예산 부담은 법안 통과 전망을 흐리게 하고 있다.

강 의원에 따르면 이 법안이 시행되면 정부 예산 부담은 올해를 기준으로 재해발생률에 따라 최소 3천322억원에서 최대 8천372억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강 의원은 “수십년간 우리 농업을 지탱해오면서 재해의 사각지대에 놓인 농민을 생각하면 국회는 물론 정부도 관련 입법이 조속히 이뤄지도록 노력하고 정부의 재원부담도 전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작권자 © 여성농업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