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ㆍ퇴근 농민도 급증, 농가 42%가 겸업

경기도 연천 백학면 노곡1리에서 농사를 짓는 유인월(42)씨는 아침이면 출근 준비에 바쁘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2003년부터 연천에서 차로 1시간15분 정도 떨어진 고양시 일산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유씨는 오전 8시면 연천으로 출발해 오후 6시까지 농사일을 한다. 왔다갔다 하느라 한달에 들어가는 기름값만 20만원이 넘는다. 유씨가 이사를 결심한 이유는 지금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1학년이 된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이었다.

유씨는 “연천에는 변변한 학원도 없고, 있다 하더라도 강사진 실력이 떨어진다.”라며 “농촌에서 자녀교육을 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교육 때문에 이사한데 대해 가족 모두 만족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업이 농사인 유씨로선 이만저만 고달픈게 아니다.
하루 세시간 가까운 출퇴근만이 아니다. 유씨가 농사를 짓는 밭과 논은 8천200㎡로 이것저것 빼고 나면 연간 순수입은 1천만원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유씨가 선택한 게 ‘투잡’이다. 11년 전부터 서울 은평구에 정육점을 내 농사일과 병행하고 있다. 낮에는 부인과 아르바이트생이 일을 하고 저녁에는 유씨가 들러 봐준다.

유씨는 “농사로만 생활비나 교육비를 충당할 수 없다. 농사야 365일 매달려야는 것도 아니고 조금만 부지런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유씨처럼 자식 교육을 위해 장거리 출ㆍ퇴근을 하거나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주말 가족’, ‘기러기 농민’들이 늘고 있다.

또 농사일만으로는 사교육비 등 늘어나는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다른 일을 같이하는 ‘투잡’ 농민도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자식 농사 위해 ‘기러기’ 감수

경기도 포천 영북면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 박동희(49)씨는 주말마다 가족들을 만나러 파주 문산에 간다.

박씨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고 있다. 아내의 직장이 문산에 있는 데다 지금은 중학교 3학년, 초등학교 6학년인 딸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10년전 이런 결정을 내렸다.

포천 사과영농조합 건물에 방 하나를 얻어 사는 박씨는 그동안의 자취 경력으로 청소나 빨래, 간단한 요리 등 집안일을 능숙하게 해낸다. 1996년 처음 포천에 와서 남의 밭을 임대해 농사를 짓던 그는 이제 사과밭 4만㎡를 가진 어엿한 농장주가 됐다. 그렇지만 ‘아이들과 같이 있어주지 못한다’는 죄책감과 빈집에 혼자 들어갔을 때의 외로움은 여전히 견디기 어렵다.

박씨는 “이제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에게 아빠가 가장 필요한 시기인데, 엄마 혼자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해 너무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충북 제천 한수면에서 22년째 사과 농사를 짓는 김운봉(45)씨도 ‘기러기 아빠’다. 그는 4년전부터 아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다. 김씨는 주말이나 비가 와서 농사일을 못할 때면 경기도 이천에 집을 얻어 사는 부인과 아들을 만나기 위해 차로 1시간20분을 달려간다.
김씨는 “한수면에는 중학교가 없어 아이가 학교를 가려면 버스를 타고 30~40분 떨어진 충주로 나와야 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라고 말했다.

■ ‘투잡’ 농민도 급증, 전체농가 41% 겸업

경북 안동시 와룡면에 사는 김모(38)씨는 낮에는 과수원과 양봉 일을 하고 밤에는 운동화 세탁일을 한다.

농사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어서면서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 남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최근에 운동화 세탁업에 뛰어든 것이다.
물론 혼자서 가게를 꾸리기는 쉽지 않아 아내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농사일 틈틈이 시간을 내 가게에 들른다.

김씨는 “이제 농민들도 투잡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라며 “갈수록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다 보니 투잡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여겨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전국 농가 가운데 겸업농가 비율은 2003년 35.7%, 2005년 37.5%, 2008년 41.7%로 해마다 큰 폭으로 늘고 있다.

겸업농가 중에서도 농업 수입이 전체 수입의 50% 이상인 농가가 31.3%(2008년 기준)나 되는 등 겸업농가나 농업외 소득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마상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농민들의 소득 구조에서 평균적으로 농업 소득이 3분의 1, 농외 소득이 3분의 2를 차지한다.”라며 “농업으로만 생활하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농지를 소유해야 하기 때문에 전업농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라고 말했다.

도시 근로자 가구의 평균 연봉(4천만원)을 얻으려면 논농사는 6㏊, 과수원은 1.5㏊ 이상 경작해야한다. 이 규모 이하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다른 수입원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다.

장사를 하는 등 자기 사업을 꾸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 겸업농가들은 인근의 농산물 가공단지나 사업장에서 일을 해주며 노임 소득을 얻는다.

김정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영농 규모를 확대해 소득을 늘리는 것은 실질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농촌 지역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농외 소득을 늘려주자는 게 요즘 농업 정책의 방향”이라고 말했다.

■ 농사 지으며 몸만‘脫 농촌’ 교육 지원 절실

농촌과 농업 전문가들은 농가 소득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농촌의 사회, 문화적 기반이 튼튼하게 형성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장 대표적인 게 교육문제다. 농촌 초등학교들이 학생 수 부족으로 줄줄이 문을 닫고 있는 현실에서 농민 학부모들은 안심하고 자녀들을 맡길 곳이 없다.

농사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면서도 몸은 계속 도시로 내몰리는 형국이다.
이런 교육 여건은 결국 인력과 자본을 도시로 집중시키게 돼 되레 농촌 경제를 피폐하게 만드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농촌 인구 통계를 보면 전체 농가의 14세 이하 인구는 2003년 37만7천여명에서 2008년 28만7천여명으로, 15~19세 인구는 17만6천여명에서 13만3천여명으로, 20~49세 인구는 101만9천여명에서 79만6천여명으로 줄었다.

소순열 전북대 농업경제학과 교수는 “농민들이 도시에서 출ㆍ퇴근하거나 가족이 도시에 따로 살림을 꾸리면 생활비가 그만큼 추가되고, 농촌에서 순환할 돈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 교수는 “젊은 세대가 자꾸 빠져나가면 농촌은 활력을 잃은 노령화 사회가 된다.”라고 말했다.
농촌 공교육을 활성화하려면 농어촌 특별전형이나 지역 균형 선발제 등 보다 적극적인 보호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민선 농협대 교수는 “농촌 지역의 학교를 살리려면 도시보다 여러가지 측면에서 불리한 농촌 지역 학생들에게 우대 정책을 펴야한다.”라며 “서울대가 하고 있는 지역균형 선발제 같은 지원 정책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는 “농업은 부부가 같이 종사해야 시너지 효과가 난다.”라며 “부모와 자녀가 함께 살면서 자녀는 지역내 중ㆍ고교에 안심하고 보낼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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