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도 예술가, 평생 남을 작품 일군다

  
 
  
 
┃김현숙 제일농장대표 : 1960년생. 정선군생활개선회장(1996~1997). 전 생활개선중앙회장. 강원도 여성발전위원회 위원. 농림부 농업연수부 외래강사. 한국농업전문대학 현장교수. 중국연변 려명농민대학 객원교수. 강원도 여성정책 심의위원. 제5대 정선군의회원 예결 위원장.


“절대로 광부랑 결혼하지도 말고 광산 근처에선 살지도 마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불안감 속으로 매일 남편을 일 보내는 어머니는 딸에게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족에게 광산업은 불안한 생활 그자체였다. 사북과 고한 근처 탄광에서 아버지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가난한 광부들이 검게 탄을 뒤집어쓰고 잠드는 반에 벼락치기로 돈을 번 광산 하청업자들이 탄광 근처의 거대한 요정과 윤락가에서 밤을 밝히는 곳이었다. 값싼 노동력에 이용당한 광부들의 분노에 사북은 폭력으로 점철되었고 석탄 사용이 줄면서 정선의 탄광들도 하나 둘 폐광되었다.

어머니에겐 농사를 짓고 사는 게 큰 꿈이었다. 딸은 농사짓는 사람과 결혼해 땀 흘려 농사 짓는 게 장래희망이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농촌지도소에서 영농기술 교육을 받다 들깨 한 줌이 한 가마니로 수확되는 것을 보고 자연과 인간의 힘에 전율을 느낀 뒤였다.



‘농사로 진 빚 농사로 갚자’
남편 전주영 씨도 공무원 집안에서 태어나 농사와 관계없는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부부는 초보 농사꾼이 되어 농사를 시작했다.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고 옆에서 봐 온 것도 아닌데 잘 할 수 있을까요?” 아내의 걱정에 남편은 이렇게 격려했다.
“백지에 그리는 그림이 더 잘 그려지는 법이지요. 남들이 반 쯤 그린 그림에 내 그림이 그려지겠어요?”

두 부부는 신혼여행 대신 그 비용으로 돼지 5마리를 구입했다. 백지 앞에 붓 쥐는 마음으로 농사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 그리는 그림인데 시행착오가 없을 리 없었다. 의욕적으로 돼지 농장을 시작했는데 1979년 돼지 파동이 터져 새끼돼지 한 마리 값이 5천 원으로 떨어졌다. 실패만 되뇌지 말자고 다짐하며 그 해 마늘 50접을 종자삼아 2천 5백 접으로 생산량을 늘렸는데 또 다시 마늘 파동이 터졌다. 창고에 가득 쌓인 마늘이 썩고 있었다. 실의에 빠져있던 어느 날 남편이 농민후계자로 선정되어 농협에서 융자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돈으로 한우 2마리와 밭을 구입했고 김현숙 씨도 경운기와 농기계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의욕적으로 시작한 것도 잠깐, 소 농장을 시작했더니 1983년부터 소 파동이 시작됐다. 송아지 딸린 엄마소를 2백 8십만 원에 구입해 3년을 키웠는데 시세가 뚝 떨어져 80만 원을 받지 못했다. 원가를 생각해도, 키운 기간을 생각해도, 사료 값을 생각해도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결과였다. 부지런히 일하기만 하면 하늘도 탄복한다던데 열심히 해도 망하는 게 농사구나 싶었다. 게다가 소 값 파동으로 농민들이 잇달아 자살을 하는데도 우루과이 라운드라며 수입 소고기가 들어왔다. 농업의 모순, 유통의 모순을 실감했고 절망했다.

정책적인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한 개인적인 실패도 잦았다. 고산지대에 방목해서 소를 키우면 소가 건강하게만 자랄 줄 알았는데 관리 부실로 종종 소들이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뒤이어 병이 들거나 농장주의 지식 부족으로 7마리의 소를 잃었다. 방목은 농장에서 키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러저러한 실패로 빚만 늘어났다. 소 파동의 타격은 심각했고 1989년 즈음엔 직격탄을 맞았다. 농사를 시작한 지 10년이 흘렀고 빚이 9천만 원으로 늘어 있었다. 서울 지역 변두리 전세 값이 3백만 원이던 시절이었으니 죽었다 깨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요, 도둑질을 해도 갚을 수 없는 돈이었다. 그때까지 가진 땅과 농장, 가축을 정리하니 겨우 5백만 원의 수익이 나왔다. 시아버지와 집안의 어른들은 5백만 원이라도 갚고 도시로 가 새 삶을 살라고 당부했다. 도시로 가서 일한다고 빚을 갚을 수 있을까, 눈앞이 깜깜했다.

부부는 밤을 지새우며 의논하다 ‘농사로 진 빚이니 농사로 갚자’고 의기투합했다. 파동이 일어나지 않을 작목, 남들이 안 하는 방법을 찾아 나섰고 고산지대에 고랭지 농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지대가 높아 옥수수와 콩 농사를 실패해 묵히고 있던 땅에 배추와 열무를 심기로 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고랭지 농업은 소규모로 짓고 있었고 수확을 해도 교통이 나빠 유통할 활로가 없었기 때문에 종사하는 농민도 많지 않았다.

부부는 정선군청을 제집 드나들 듯 찾아다니며 도로 공사를 요청했다. 관계자들을 찾아가 “도로가 없어서 농산물 출하가 불가능하다니 말이 되느냐”며 “고랭지 농업으로 정선 농민들의 활로를 모색하자”고 설득하고 다녔다. 부부의 간청을 계기로 도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부부는 배추 농사에 목숨 걸듯 달려들었다. 잠을 세 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밤이 되면 셩운기와 오토바이의 불을 밝히고 열무를 뽑았다. 10여 년의 실패와 좌절을 보상해주듯 그 해 깨끗하고 싱싱하고 맛이 단 배추가 트럭 2백 대 분량으로 생상되었다. 도로가 뚫려 유통도 용이했다. 그 해 배추 수익만으로 2억 원을 벌었다. 대성공이었다. 부부는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농사꾼의 아내는 보조자가 아니라 동업자

그녀는 결혼 직후부터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일을 하는 새댁으로 유명했다.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농가를 돌며 음식물 쓰레기를 수거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물 쓰레기를 받으러 가는 그녀를 보고 이웃들은 말리고 수군거렸다. 보수적인 농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때때로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요시하곤 했다.

불필요한 비난에 남편에게 일임하고 다른 일을 할까도 고려했지만 남의 이목 때문에 당장 절실하고 시급한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누가 뭐라 하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그리고 여자라는 할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열심히 살고 있는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곧 정선에서 오토바이 타고 농사일 하는 유일한 젊은 여성이 되었다.

여자라는 이유로 농업의 보조자로 떠밀리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삶에 대해 더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왔고 여러 곳에서 그 빛을 발했다. 그녀는 포크레인 자격증을 ek고 기계들을 섭렵해 수리에 나섰다. 남편보다도 더 꼼꼼하고 정확해 요즘도 기계 관련한 업무는 김현숙 씨 몫이다. 이 뿐이 아니었다. 일찍부터 남편과는 부부 공동 명의로 재산을 공유했다. 그 시절만 해도 ‘평등한 부부’ ‘부부 공동재산’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고랭지 배추로 성공한 뒤 빚 갚는 것보다도 먼저 농사에 재투자를 했어요. 고랭지 밭을 두 배로 늘리면서 그 밭의 명의는 제 이름으로 해달라고 남편에게 요구했죠. 그래도 알고 보면 남편이 얻은 게 더 많아요. 둘이 더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됐고 그 이후에 늘린 재산에 대해선 번갈아가며 명의를 등록했는데 알짜배기는 남편이 갖도록 제가 양보도 했거든요.“농사꾼의 아내라는 보조자가 아니라 공동으로 밭을 일구는 동업자로 두 부부는 서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부모의 태도를 보고 자란 두 아들과 며느리들도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로 가족관계, 부부관계를 유지해갔다.

김현숙 씨는 자녀의 결혼 후에 일부 농토를 며느리 이름으로 등록시켰다. 며느리도 집안의 보조자나 부모의 농장을 이어받은 농사꾼의 아내로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며느리 역시 30년 전 자기처럼 농촌에서의 삶을 선택한 한 여자이기에 며느리 스스로 자기 땅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 그리고 책임을 갖게 하는 것이 당연했다. 이 파격적인 정책에 사돈 부모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아니 결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며느리를 어떻게 믿고 그러십니까?”

끊임없는 노력으로 ‘소 아줌마’라는 별명 얻어

한편 그녀는 강원도 여성 최초로 가축 인공수정사 자격증도 땄다. 번식학, 출산학 교육을 받는 1백 3십여 명의 교육생 중 여자는 김현숙 씨 혼자였다. 가축 인공수정은 인공수정사가 족보가 있는 품질 좋은 수소의 정자를 받아 직접 암소의 자궁에 넣어 이뤄진다. 처음 인공수정사를 시작하자 동네 사람들은 수군대기도 했다. 멀쩡한 여자가 여기저기 남의집 소 궁둥이에 손을 쑥 넣고 무슨 낯 뜨거운 짓이냐고도 했다. 하지만 축산 농가의 가장 중요한 재산 목록 1호인 소에 관한 일이었고, 앞장서 소 임신감정을 해 주는 김현숙 씨의 노력에 마을사람들도 감탄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소아줌마’라는 별명도 얻었다.
“농가에서 올해 우리 소가 새끼를 뱄는지는 가장 중요한 정보거든요. 저도 소를 만지면서 소의 건강상태나 임신여부를 알 수 있게 되었지요.”

오랜 축산 경험만으로 부정확한 정보를 믿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부정확한 정보나 막연한 믿음만으로 다음 해 농가가 예상치 않은 타격을 입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온갖 비난과 수군거림을 감수하고 김현숙 씨는 인공수정사로서의 역할을 해 나갔다. 농가 소에 문제가 생기면 수의사보다도 김현숙 씨를 먼저 찾는 주민들도 많아졌다.

현재 <제일농장>은 매년 2백 마리의 한우를 키우고 있다.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이름을 붙여주며 쏟는 정성은 지극하다. 5살이 되면 내보내는데 성장이 늦거나 유난히 허약해 7~8년을 함께 지내다 내보내는 경우엔 잘 커줘서 고마운 마음에 떠나보낼 때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요즘 가장 애착이 가는 소는 ‘미남이’다. 암소이지만 얼굴이 늠름하게 잘 생겼다고 붙여준 이름이다. 유난히 김현숙 씨를 따르는 미남이는 ‘엄마’가 건초와 사료를 주러 농장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다가오는 녀석이다. 김현숙 씨도 미남이를 제일 먼저 만나고 싶어 농장 입구와 가장 가까운 축사에 미남이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농사 초기 정책 실패로 당시로선 천문학적인 빚을 졌던 김현숙 씨. 농산물과 축산물 수입이 밀려들고 정책은 불안정하고 농사짓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며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지는데 현재도 김현숙 씨와 같은 농업 분야의 새로운 도전과 성공이 가능할까?

“전 된다고 봐요. 아직 가능성은 많이 있습니다.”
자신 있게 말한 김현숙 씨는 몇 가지 아이디어도 귀띔해 주었다.
다른 농민들이 관심 갖지 않는 분야를 찾아내 안목을 가지고 연구, 투자한다면 불모지 같은 분야에 성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5월 지방자치 선거에서 김현숙 씨는 지역주민들의 지지로 정선군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출마를 망설이던 차에 시부모님, 아들 내외를 모아놓고 가족회의를 열었는데 가족들이 강력하게 설득해 출마를 결심하게 되었다.
“직접 농사를 지었고 농사의 문제나 지역문제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정치를 하면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올 것”이라는 게 아들의 격려였다. “어머니의 농장 경영과 살림 능력은 누구나 칭찬하니 의회에 가서도 꼭 그만큼만 하면 될 것”이라는 며느리의 격려도 있었다. 남편 전주영 씨는 정선 농협 조합장을 병행하면서 농사일과 가사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외조했다.

지역 토박인 여성농업인이 군의원으로 당선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김현숙 씨는 농사를 지었기에 현재 농민들의 고민을 알고 있다. 문제 사안이 터지면 의회에 대책회의를 주도하고 고산 지역의 수도 공사를 직접 주선하며 정선에 사는 외국인 새댁들의 한국 정착도 돕는다.

이웃들이 자기 집 소의 임신 여부가 알고 싶어 김현숙 씨를 불렀듯이 이제는 올해 농사 결과와 농업 정책을 알고 싶어 김현숙 씨를 찾는다. 정선군 남면의 인공수정사가 정선군의회의 정책 조정자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농사는 예술, 혼신을 다해
자기만의 세계로 일구는 것

숲과 물이 맑고 눈이 많은 오지 마을 정선은 최근 카지노로 더 유명해졌다. 카지노가 들어선 덕에 지역 인프라가 구축되고 일부 지역 농토가 값이 오르긴 했지만, 모텔과 전당포, 전당 맡긴 고급차가 늘어 선 불야성의 정선이 농민들의 삶을 개척해 주는 것은 아닐 터. 정선의 땅을 가능성의 땅으로 만드는 건 카지노 산업이 아니라 김현숙 씨와 같이 불모지에서 가능성을 만들어 낸 농민들의 땀이다.

“농사는 예술과도 같아요. 혼신을 다해 자기 작품을 만들 듯 자기만의 세계를 일구는 것이니까요.”
김현숙 씨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의 현장을 만들어냈고 또 성공했다. 자신의 땅을 가꾸며 산과 물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곳을 싱싱한 배추와 건강한 소들이 자라는 땅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농가에 좌절을 안겨다 주던 제도를 바꾸기 위해 정책을 만드는 곳에서도 땅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려 한다. 그녀가 땅을 일궜던 동네 이름은 정선군 남면 ‘무릉리’. 그녀와 같은 여성농업인들이 만들어 가려는 새로운 세계가 곧 농업의 무릉도원이리라.




◇ 김현숙대표 성공 4계명

1.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라.
가장 가까운 가족과 이웃에게 삶의 태도나 경영방식을 인정받고 있는가? 그들의 평가를 농사의 성공 지표로 삼아라.

2. 한 우물을 파라.
떠돌듯 이직이 가능한 업이 아니므로 농사는 어쩔 수 없는 평생직장. 한 우물을 파는 마음으로 승부를 걸어라.
3. 실패는 반면교사 재기는 현장교사
몇 차례의 실패는 농사꾼이라면 누구나 경험한다. 실패와 재기를 반복할 때마다 성공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잊지 말 것.

4. 경운기 시동 걸듯 처음의 고비를 넘어라.
경운기를 다뤄보지 않은 사람은 시동 거는 것이 가장 어렵다지만 시동이 걸린 후엔 운전자 마음대로 움직인다. 농사도 처음의 고비를 넘어서야 시동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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