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100% 유기농 다큐’ <땅의 여자>

농촌 전문 다큐멘터리감독 권우정 감독의 2009 작품 <땅의 여자>의 주인공들은 여성농민이다. 부산에서 대학을 마치고 경남 지역의 농촌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는 소희주(37·진주시 지수면), 강선희(39·합천군 가회면), 변은주(37·창녕군 남지읍)씨를 권우정 감독은 ‘언니들’이라 부르며 따라다닌다.

이들은 같은 대학 같은 동아리 출신으로 거의 같은 시기에 반경 1.5㎞ 농촌으로 들어가 농부의 아내가 되었다. 말하자면 결혼을 통해 ‘귀농’을 한 것이다. 도시 출신인 이 세 여성의 입장에서는 ‘농촌으로 돌아갔다’는 표현보다는 ‘농촌으로 이주했다’는 표현이 적절할 듯싶다. 그래서 귀농 11년차이긴 하지만 아직도 농사에 서툴러 면박을 당한다.

다부지게 그을린 얼굴에, 입가에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는 소희주 씨에게는 엄마 나가지 말라고 떼굴떼굴 구르는 서너 살짜리 아이들이 있다. 밤에 여성농민들을 만나러 차를 몰고 나가던 그는 “저렇게 떼어놓고 가면 애들한테 안 좋겠지?” 혼잣말하듯 묻는다.

 이들은 완고한 시집살이를 겪고, 가부장적인 남편의 편견에 부딪히기도 하며, 다른 여성들처럼 육아와 가사의 부담에 시달린다.

여성농민은 농사일에 대한 결정권이나 재산권에서 소외되기도 한다.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고 아이들은 자라고 돈 들어갈 데는 많다. 생활에 눌릴 때 혼자 밭에서 일하며 내뱉는 한숨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땅의 여자’들은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간다. 폐쇄적인 지역 공동체-항상 이방인 취급을 하는 낯선 곳에서, 이들은 눈치를 받건 말건 위축되지 않고 씩씩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변은주 씨는 시댁의 반대를 무릅쓰고 분가해 저녁시간에 새로운 지역사업을 꿈꾸며 사회복지사 공부를 한다. 소희주씨는 살림을 못한다는 타박에도 자책하지 않고, 일이 생기면 하우스에서 휭 빠져나가 지역의 어른들을 만나고 조직한다.

그는 서울상경투쟁을 망설이는 어른들에게 “농촌은 할매들이 다 지켰다, 남자들이 싸우겠냐, 우리 할매들이 앞장서야 한다”고 질기게 설득한다. 그렇게 할매들과 노래를 하고 길에서 집회를 해낸다.

강선희 씨는 밤마다 공부방을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자식을 키우고, 농사를 짓고, 소를 기르며, 지역의 정치활동을 한다.

농촌에 대한 꿈, 사람다움에 대한 꿈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성과가 없는 듯 보이는 길을 ‘한발 한발 나아간다’고 믿으면서 싸워나간다.  강선희 씨는 권우정 감독을 작업으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하다. 2005년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홍콩 원정단의 영상작업을 맡았던 권우정 감독은 시어머니 권순남(69)씨와 동행한 강선희 씨의 모습에서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한다. 시위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사는 농촌의 삶이 궁금해진 것이다. 강선희 씨는 세 인물 중 가장 드라마틱한 모습으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이 영화에는 농촌의 사계가 담겨있다. 권우정 감독이 담은 이들의 1년에는 농민들의 상경 시위와 국회의원 선거가 끼어있다. 상경시위를 조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소희주 씨에게 농민회 선배 중 한 명이 말한다. “우리가 아무리 농촌 문제의 심각성을 외쳐봐야 나서지 않는다. 직접 당해본 후에라야 나설 것이다. 그러니 너도 미리 나서지 말고 상황이 악화될 때까지 기다려봐라.”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우는 아이들을 떼어놓고 나선 길에서 듣게 되는 말 치고는 너무 씁쓸하다.

<땅의 여자>에는 허덕거리는 숨소리와 땀, 눈물과 웃음, 바람이 함께 담겨 있다. 희망과 즐거움을 섣불리 말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아주 느리고 한결같은 걸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우리의 땅을 지켜온 것은 그런 걸음들이다.

영화를 빛내는 또 다른 요소는 권우정 감독의 존재감이다. 다큐멘터리랑 농사가 어떻게 다르냐는 소희주 씨의 질문에 “농사는 아무 생각 없이 할 수 있어서 좋다”는 다소 위험한 솔직함을 드러냈던 권우정 감독은 세 주인공의 기쁨과 희망 뿐 아니라 아픔과 슬픔까지도 가감없이 담아낸다.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 것을 후회한다”고 고백할 만큼 힘들었을 어느 순간(영화를 봐야만 안다)에서도 그녀는 괴로움에 눈 돌리지 않고 끈질기게 뷰파인더를 바라본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농촌으로 현장투신한 운동가로 첫발을 내디뎠으나 농사와 가사와 육아, 그리고 운동까지를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서 매 순간에 갈등하고 고민하는 이들. 삶의 동반자이자 운동의 동지인 남편들과 때론 싸우고 때론 타협하며 늘 팽팽한 긴장상태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이들. 이들의 삶이 오롯이 담겨있는 <땅의 여자>는 대지의 풍요로움과 닮아있다.

<땅의 여자>는 2009년 부산영화제 피프 메세나상,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수상했고 9월 9일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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