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위대한 영국의 왕이자 유럽(Europe)의 할머니!”

  
 
  
 
◇해가 지지 않는 제국
나는 빅토리아(Victoria)다.
나는 무려 64년 동안이나 영국의 왕으로 군림했다. 1819년에 태어난 나는 열여덟 살이 되던 1837년 왕위에 올랐다.
내 치세에 우리 영국은 세계최강국으로 지구를 호령했다.

요즘은 미국대통령이 힘자랑깨나 한다지만, 150년 전 나의 시대에는 지금 미국의 부시대통령과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을 합해야만 겨우 나의 영광에 미친다고나 할까?... 아무튼 대영제국제왕의 체통에 조금은 쑥스럽지만 내 자랑 좀 해야겠다.
여러분은 영(英) 연방(聯邦)이라는 것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인도, 파키스탄,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남아공화국 등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와 심지어는 그 막강한 미국까지 내 시대에는 우리 영국의 식민지였거나 영향력 아래에서 내 눈치를 살펴야했다. 영연방은 지금까지도 존속한다. 아 참! 내가 여자라는 사실은 미처 얘길 못했군! 그렇다. 나는 여왕이다.
나는 1877년부터는 인도의 황제까지 겸임했다.

당신들의 자존심 긁는 소리 좀 해볼까? 아무리 부인해도 당신들 조상들은 예로부터 중국을 상국(上國)으로 모셔왔다. 약소국의 생존을 위한 필연적 선택이었다거나, 절묘한 전략적 외교라는 말은 우리가 듣기에는 조금 궁색한 변명처럼 여겨진다.

알다시피 우리 영국은 섬나라다. 우리나라의 면적은 당신들이 사는 한반도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좁은 나라다. 그런데 우리는 당신들이 대국으로 받들던 중국(청나라)을 간단히 물리치고(아편전쟁;1839~1842년) 우리의 강력함을 세계에 과시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홍콩은 그 전쟁의 노획물로 이후 100년간 우리 영국의 일부로 존속됐던 것이다.

◇‘平凡’에서 ‘非凡’으로
나의 아버지는 하노버 왕가의 군주였던 ‘켄트’ 공(公)이다. 그는 내가 태어난 다음해에 돌아가셨으므로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초상화를 통해서만 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어머니는 누가 독일사람 아니랄까봐 나를 정말 엄격히도 키우셨다. 어머니와 그 주위 사람들이 나를 너무 못살게 굴었다는 기억은 내가 노년이 돼서도 떠나지 않아 나는 거의 죽을 때가 돼서야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었다. 충직한 독일인 보모이자 가정교사였던 레첸은 늘 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코치(coach)했다. 그녀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나는 올바르게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영국 왕위계승 최우선 순위였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인자였던 작은아버지마저 사망하자 18세 처녀의 몸으로 ‘덜컥’ 대영제국의 왕위에 오르게 됐다.
당신들의 옛날 나라에도.... 아! 신라라 했던가? 여왕이 무려 세 명이나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잘 알고 있다. 그들도 모두 대단한 실력자였다지?

아무튼 여왕이 된 나는,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좀 까칠했었던 것 같다.
우선 1840년, 그러니까 내 나이 21세에 결혼한 앨버트 공(公)-그는 독일 출신으로 나의 사촌오빠였다-에게 막 대했던 것이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명색이 여왕의 남편인데 나는 그의 존재 자체를 무시했다. 그러자 우리 영국의 신료들과 내각 사람들도 모두 그를 ‘소 닭 보듯’했다. 그러나 ‘점잖고’ ‘교양 있고’ ‘인내심과 신사의 기품을 갖춘’ 내 남편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따뜻한 목소리로 나를 위해 조언해 주었다.

어려운 정치적 선택과 갈등의 순간마다 남편은 놀라울 정도의 객관성을 유지하며 나를 보필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해 남편을 존경하게 되었고, 마음 속 깊이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파트너는 내 즉위 당시의 총리 ‘멜번’이다.
멜번 총리는 한마디로 푸근한 사람이다.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던 나는 그에게서 아버지를 느꼈다. 생각해 보라. 겨우 열여덟 살의 여자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를...

그는 나를 진정으로 존중했고, 아버지들이 장남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정신적, 물질적 모든 자산을 물려주고 싶어 하듯이 나에게 그의 모든 역량을 쏟아 부었다.
결국 그는 위대한 빅토리아 여왕을 만들었던 것이고 결국 위대한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우리 영국은 그 시절 이미 의회민주주의를 확립해 나가고 있었다.
여러분이 의원내각제라고 부르는 정치형태는 영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는 내 재임 기간 동안 왕은 ‘군림(君臨)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역시 중요한 결정은 여왕인 나의 입김이 절대적이었다. 정치적으로 풀리지 않는 미묘한 결정, 양당 간의 극한대립 등은 나의 ‘짐짓 모르는 척하면서’ 하는 중재를 통해 극적으로 풀리곤 했다.
이 절대원칙은 오늘 날까지 이어진다. 나의 이러한 원칙은 오히려 우리 영국 왕실의 안전과 존속을 지켜낸 가장 중요한 ‘정치적 선택’이었다고 감히 나는 자부한다.
자 한번 정리해 볼까?

나는 어린 시절의 가정부였던 ‘레첸’과 사랑하는 내 남편 ‘앨버트’ 그리고 존경하는 ‘멜번’ 수상 덕에 ‘평범한 여인’에서 ‘위대한 여왕’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나는 앨버트와의 사이에서 1840년 첫 딸 ‘비키’공주를 시작으로 1857년 비트리스 공주까지, 4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낳았다. 내 자손과 손자, 그리고 죽기 전에 본 37명의 증손자들은 유럽 각국의 왕가와 귀족들과 혼맥을 맺었으므로 나는 ‘유럽의 할머니’라고도 불린다. 앨버트는 나와 마찬가지로 검소하고 수수한 삶을 즐겼다. 그는 심지어 여행지에서 평민의 집에 묵으며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소박한 사람이었다.

나의 시대에 영국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나라답게 눈부신 사회·경제적 발전이 거듭됐다. 수공업적, 전근대적 작업 단위는 기계와 근대적 생산라인으로 바뀌며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고, 섬유업, 제조업에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다. 내가 즉위하기 전이었던 1825년, 스티븐스이라는 자가 증기기관차를 발명함으로써 영국은 세계에 ‘철도시대’를 선도했다. 석탄을 탄갱에서 뱃길까지 운반하는 스톡턴∼달링턴철도가 개통되었고, 1830년에는 맨체스터∼리버풀철도가 개통되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유럽, 아시아 할 것 없이 세계 각국은 허겁지겁 영국의 철도기술을 배워갔다.

빅토리안 스타일(Victorian style)이란 말을 들어봤는가? 나와 훌륭한 내각이 이뤄낸 안정된 사회는 문학, 미술, 건축, 인테리어, 패션 등 문화예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내 시절 영국의 문화적 현상과 경향을 후인들은 빅토리안 스타일(Victorian style)이라 불렀던 것이다.
1861년 12월 4일 남편 앨버트가 42세의 나이로 죽었을 때 너무 깊은 슬픔에 빠진 나머지 근 1년간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을 제외하면 나는 64년간 충직히 나의 ‘여왕직’을 수행해 냈다.
후세의 사가들이 대영제국의 절정기라 부르는 나의 재위기간에 영국의 영토는 지구의 약 3분의 1에, 인구로 따지면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었다. 나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많은 신민을 거느렸던(?) 여자였던 셈이다.

물론 나에 대해 좋은 평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의 급진적 개혁을 주장했던 ‘차티스트’ 무리를 강력하게 탄압했던 것도 나의 의견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이때의 공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탄압은 많은 희생자를 내기도 했다. 아일랜드 지역에서 비참하게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곡물법’폐지를 지지하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솔직히 나는 대외적인 것, 국제적인 것에 보다 관심이 많았다. 이런 것들은 민중의 삶에 다소 무관심했던 나를 비난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나는 세계 최강국 영국과 그 제국들의 왕으로 64년을 군림하고 1901년 세상을 떠나 왔다.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았고, 가장 강력했고, 가장 먼저 민주주의가 태동된 그 시절의 영국이 나는 그립다. 영국인들은 빅토리아 시대를 추억한다. 나는 빅토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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