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중국 한나라에 맞선 ‘베트남 혼’의 화신

  
 
  
 
우리에겐 생소한 ‘쯩(徵)자매’. 그들은 베트남 정신의 정수(精髓)요, 민족혼의 화신으로 칭송받는 고대 베트남의 여걸이다. 베트남 민족에게 존경과 숭배의 대상인 자매의 위상은 베트남전역에서 볼 수 있는 쯩자매 사당, 쯩자매 축제, 미술, 건축물, 동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자매를 기리는 노래, 시, 문학과 쯩자매 도로는 물론 기념우표까지, 그들에 대한 베트남민족의 사랑은 꺼지지 않는 횃불과도 같다.

우리와 비슷한 고난의 역사를 걸어왔고 같은 한자(漢字)문화권이자 유교문화권인데다 외세에 의한 분단의 아픔까지, 정말 남 같지 않은 베트남의 영웅, 쯩자매 이야기다.

효수(梟首)된 남편의 머리
‘쯩 짝(徵側)’은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다정했던 남편 ‘티 삭’. 그러나 용감한 장수요, 인자한 영주였던 남편은 저 침략자들…. 그러니까 중국 한(漢)나라의 병사들과 싸우다가 고기 덩어리 같은 처참한 주검으로 거리에 널 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나라의 수탈이 심해져가자 지방의 유력자들을 모아 한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완전한 독립 왕조를 세우기 위한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나라의 첩보에 걸려 발각되고 말았고 끝까지 저항하던 티 삭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 쯩 짝을 비롯한 일행은 포위망을 뚫고 안전지대로 피하는데 성공했다. 남편의 잘린 머리가 매달려 있는 것을 멀리 숨어 지켜보던 쯩 짝.
‘장대에 걸린 저 피 떡 진 머리가 그 인자한 미소를 짓던 남편의 아름다운 얼굴이란 말인가.’ 쯩 짝은 이를 악물고 반드시, 반드시 저 한나라 놈들을 물리쳐 나라를 되찾고 남편의 복수를 이루리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세계제국을 꿈꾸는 한나라는 남쪽의 베트남에도 야욕의 손길을 뻗었다. 한나라는 중원을 제패한 후 동북쪽의 패자(覇者) 조선(朝鮮)을 병합하고, 서쪽으로는 누란제국 등 강국을 잇달아 격파하며 로마제국까지의 교통 길을 열어 놓은, 당대 로마제국과 함께 지구의 최강자였다. 베트남은 중국 운남성과 국경을 맞대고 험난한 지형과 덥고 독충이 우굴거리는 밀림을 자연 방패삼아 고대로부터 중국의 침략을 막아왔으나 기원전 111년부터는 마침내 한나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우리나라 고조선도 그 3년 후인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 멸망했다.

봉기
“점 점 한나라의 지배는 가혹하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일어서야 합니다.”(쯩 짝)
“이번 봉기에서 보았듯이 결국 영주님만 잃고 말았을 뿐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강합니다.”
“그들이 보장해 주는 편안한 자리가 탐나는 게 아니고요? 용감한 ‘비엣족’(베트남족을 이름) 남자들의 용맹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나요?”(쯩 짝)
“…….”

남성 장수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00년 전 우리가 한나라에 점령당한 후에 그들은 우리가 조공만 고분고분 올리고 반란만 꾀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자치권을 허용해 주고, 가혹하게 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그들의 노예로 살아가야 합니까? 한(漢)의 문물이 뛰어나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문명이 개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까지 그들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게다가 한나라가 각지에서 전쟁을 하느라 십여 년 전부터는 우리의 산물을 모조리 빼앗아가다시피 하고 있지 않습니까?”(쯩 짝)
“그래도….”

이때, 아직 미혼이었던 쯩 짝의 여동생 쯩 니(徵貳)가 나섰다. 쯩 니는 뛰어난 호소력을 지닌 웅변의 달인이었다. 쯩 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거지처럼 엎드려 사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요? 저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단 하루 만 이라도 이 땅의 주인으로서 살아봅시다. 죽을 때까지 힘을 다해 싸워봅시다. 이제야 말로 백년만의 족쇄에서 벗어납시다.”

쯩 짝, 쯩 니 자매의 피 끓는 호소는 그러나 좀처럼 먹혀들지 않았다.
우선 우수한 병기와 조직이 앞서있는 한나라가 너무 두려웠고, 지휘자가 여성이라는 점이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 지배 하에서 체질화된 식민지 근성도 뿌리 뽑기 힘든 요소였다.

자매는 어느 날 단둘이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며칠 동안 자매들이 보이지 않자 사람들 사이에 자매들이 분을 못 이겨 자결했으리라는 소문이 나돌 때쯤이었다.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놀랍게도 그녀들은 여기저기 할퀴고 찢겨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왔던 것이다.

자매는 호랑이의 가죽을 벗기고 거기에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 것과 전투에 임하는 결의, 작전 명령을 써 넣었다. 사람들은 ‘호랑이가죽 문서’를 보고, 아니, 여자의 몸으로 호랑이와 목숨 걸고 싸움으로써 베트남 백성들을 격동케 하려는 자매의 결연함에 감동했다. 베트남인들은 그렇게 봉기(蜂起)했다.

짧은 독립, 영원한 단심
사람들은 앞 다퉈 전투용 코끼리와 말을 바쳤다.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니 무려 8만 명에 달하는 군사가 모였다. 자매는 심금을 울리는 독려를 통해 군 장비 제작을 위한 철기와 각종 재료, 군량미를 풍부하게 마련할 수 있었다.

지휘자는 모두 36명의 여성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군대였다. 폭발적인 공격력으로 무장하고 죽음을 불사하는 8만 베트남 민병대에게 한나라는 손 쓸 겨를도 없이 패퇴했다. 베트남을 깔보고 방비를 게을리 했던 한나라 부대는 기습 한 방에 어이없이 무너져 버렸고 본국으로 겨우 물러날 수밖에 없다.

베트남은 북부의 65개성을 탈환했다. 한나라를 몰아낸 베트남은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한나라의 광무제(光武帝;재위 기원후 25~57년, 한나라 고조 유방의 9대손)는 격노했다. 기원후 43년, 그는 남부군을 총 집결시켜 다시 베트남으로 쳐들어왔다.

작정하고 최정예로 중무장한 한나라 군대는 막강했고, 그 규모와 장비 면에서 베트남군을 완전히 압도했다. 쯩 자매는 지금의 베트남 하노이 인근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의 부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포로가 된 베트남군은 전향을 거부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때 목 베임을 당한 자가 수 천에 이른다고 한다.

자매는 퇴각을 거듭하다가 막다른 지점에 이르렀다.
“동생아. 죽어가는 젊은 병사들의 아까운 목숨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로구나. 그러나 우리는 우리 종족의 자존심을 보여주었다.”

“언니. 살아서 저 놈들의 손에 잡혀 치욕을 당하느니 저 송코이 강에 뛰어들어 명예를 지키렵니다.”
자매는 손을 잡고 강물로 투신했다. 쯩 짝과 쯩 니의 위대한 항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불과 3년간의 참으로 짧은 ‘감격시대’였다.

인민의 별
쯩 자매는 지금의 베트남 북부, 그러니까 중국 운남성과 북베트남, 라오스의 접경지대쯤에 살던 고대 비엣(越)족 사람이다. 지방 유력가문의 딸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자매는 부모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고 여자아이들이었지만 교육도 제대로 받았다.

언니 쯩 짝이 지역 영주 티 삭에게 시집갈 때만 해도 이들의 인생은 그저 평범한 귀부인으로서의 그것으로 끝날 것 같았다. 쯩 짝은 남편 티 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티 삭은 한나라의 통치에 강한 불만을 품고 어떻게든 베트남이 한나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던 사람이다. 은밀히 독립전쟁을 준비하다가 발각돼 죽음을 당한 티 삭의 분사(憤死) 이후, 쯩 자매는 독립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준비된’ 인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어떤 카리스마나 영향력, 지명도가 없었다면 그리 쉽게 대군을 모으고 최강대국 중국과 전쟁을 벌이는 엄청난 일을 해 낼 수 있었을까?

베트남은 그 날의 패배 이후 무려 천년 가까이 중국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베트남 민족의 혈관에 면면히 이어진 ‘쯩자매’의 불멸의 정신은 972년 ‘응오꾸옌’ 장군에 의한 독립 쟁취, 1200년대 몽골 침입시 ‘찐 홍 다오’ 장군의 몽골 격퇴, 1428년 명나라에 대한 투쟁과 ‘레 왕조’ 창건, 19세기 대 프랑스 항전, 1960년대부터 이어진 대미(對美) 항쟁과 승리, 1970, 80년대 중국과 국경 전쟁에서의 승리 등 누구도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그들 민족의 무서운 저력으로 자리 잡았다.
쯩 자매는 불멸의 전사요, 인민의 별로 베트남 인민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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