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이고 흐르는 개울가에 살았습니다. 안개가 자욱한 날에도, 햇살이 자글자글 모래 위로 내려앉는 날에도 아침이면 어김없이 백로들이 날아와 앉곤 하던 강이 내가 몸담고 있던 집 옆으로 흘렀습니다.
늦둥이 딸아이가 여섯 살이 넘도록 우린 그 집에 살았습니다. 떠나기 싫어서 살았던 게 아니라 자꾸만 발목을 움켜쥐던 가난 때문에, 그늘진 응달을 수없이 안으며 그 집에 살았습니다.

햇살이 드나드는 일은 드물었지만 내 웃음을 햇살 대신 채우며 살았습니다. 어쩌다 햇살 한 조각 붙잡아 두면 금방 떠나가곤 하던 집, 건강하다는 이유 하나로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딸아이랑 손을 잡고 강가에 나가면, 시가 둥둥 떠내려 오던 강이었습니다.

김용택 시인이 노래했던 섬진강보다 더 아름답고 맑은 강이라고 선생께 자신있게 자랑했던 강입니다.
백로들은 아침마다 떼를 지어 그 강에 내려앉았습니다. 신문 안쪽에 끼워 넣는 전단지처럼 나는 매일 아침 내 기도를 백로의 날갯죽지에 끼워 넣곤 했습니다. 백로들은 내 기도를 어쩔 수 없이 접수해야 했고, 내 기도를 품은 채 일제히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곤 했습니다. 강물은 맑았고, 여름이면 강둑에 애기똥풀이 노란색 이야기를 자잘하게 뱉어내던 곳이었습니다.

“나는 그저 천천히 왔을 뿐인데, 백로 한 마리가 내 차에 부딪혔어.”
바닥에 떨어진 백로를 길 가장자리로 치우지도 못하고 그냥 와 버렸다는 남편이 마음을 앓으며 누웠습니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렸고 내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잠이 든 남편이 깰까봐 현관을 조심스레 빠져나와 강 건너편 길까지 차를 몰아갔습니다.

윤화(輪禍)는 처참했습니다. 아침마다 내 하얀 기도를 안고 날아오르던 백로들 중 한 마리가 빗길에 짓이겨져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차를 한쪽에 세우고 파편처럼 길바닥에 흩어진 백로의 살점들을 모았습니다.
“미안해, 용서해줘”

그렇게 말하면 조금은 용서가 될 것 같았습니다. 비는 여전히 부슬부슬 내렸고, 짝 잃은 백로 한 마리가 강물에 우두커니 서서 슬픔을 뚝뚝 잘라 먹고 있었습니다. 부서져서 형체가 일그러진 백로를 흰 종이에 싸서 벚꽃나무 아래에 묻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그 나무에선 백로빛 벚꽃이 피었지만은 백로들은 더이상 떼를 지어 날아오지 않았습니다. 빈 강에는 우두커니 몇 마리의 백로들만 기일인 듯 다녀가고 나도 더 이상 강가 그 집에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늘 그 강을 지나 다니며 한 마리 백로를 생각합니다.

하얀 날개 속으로 밀어넣었던 내 기도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백로 한 마리 내 기도와 몸 바꾼 그 강가엔 벚꽃잎이 오늘도 흔들립니다.


박 정 실 ┃고령군 생활개선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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