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세고, 부강하고, 세련된 ‘러시아’의 빛과 그림자

  
 
  
 
원수 같은 부부‘휴~ 저렇게 못생겼다니….’
1729년에 태어나 16세가 되기까지 그녀가 꿈꾸어 왔던 결혼과 남편에 대한 환상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소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타 폰 안할트 체르브스트’라는 긴 이름의 이 어린 신부는 러시아의 왕세자에게 시집 온 독일 제후국의 공주였다.
소피가 러시아로 시집왔을 때, 러시아는 ‘엘리자베타’ 여왕이 통치하고 있었다.

여왕은 독신이었는데 후계자(황태자)로 삼은 것이 친척 조카뻘인 ‘카를 울리히’였고, 빨리 후손을 보기위해 그의 결혼을 서둘렀던 것이다. 다만 여왕은 황태자의 신부 감으로 ‘힘없는’ 집안의 딸을 선택하려 했다. 훗날 황태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 황후집안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멀리서 이 소식을 들은 소피의 어머니 ‘요한나’는 딸을 러시아 황후에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해 이 결혼에 매파를 댔고 뜻밖의 결과를 얻어냈던 것이다.

남편의 얼굴은 천연두로 얽어버린 데다가 기이하게 일그러졌고 그런 자신의 외모에 대한 가학적 심리로 행동이 돌출적이고 급작스러웠다. 지능이 좀 모자라지 않나 싶게 아둔한 구석이 있는가 하면 심술을 부리고 음모를 꾸밀 때는 예외적으로 비상한 두뇌가 번뜩이는, 한마디로 ‘한 짐 덩어리’ 같은 남편이었다.
훗날 ‘표트르 3세’로 러시아의 황제에 오르는 이 왕세자와 어린 신부는 결혼 첫 날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해 평생을 마치 원수처럼 지내게 된다.

왕세자는 아내의 눈 따위는 아랑곳도 없이 수많은 여성들을 편력하며 바람을 피우기 일쑤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아내인 소피공주는 그런 남편에게 손톱만치의 질투도 느낄 수 없었다. ‘애정 제로’ 부부였던 것이다.
‘언젠가 나도 기회가 된다면 바보 팔푼이 같은 너 말고 멋지고 늠름한 남자들과 마음껏 바람을 피워 보일테다….’

실제로 그녀는 남편 외에 평생 동안 21명의 공식적인 애인을 ‘거느리고’ 마음껏 욕정을 달랬다고 한다. 성 페테르부르크(러시아의 유명한 도시)의 수비대 중위 ‘그레고리 오르로프’도 그들 중 하나였다.
소피는 러시아 정교 교회로부터 ‘에카테리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쿠데타로 정권 장악
1761년, 남편이 ‘짜르(러시아에서는 황제를 짜르라 부름)’에 올랐다. ‘표트르3세’다.
황후가 된 에카테리나(소피)는 그 동안 쌓아두었던 인맥을 활용할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지난 16년간 저 얼간이와 살았던 세월은 끔찍한 것이었지. 그의 황후로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에카테리나는 러시아로 시집 온 이후 많은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러시아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러시아 정교 성직자들과 군(軍) 실력자, 귀족, 지방 영주 등 힘 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왕세자비 에카테리나의 비상한 두뇌,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기발한 유머, 아침 햇살 같은 명랑함과 활발함, 사람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에 매료돼 있었다. 그녀는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낚아채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과는 대조적으로 황제인 표트르 3세는 ‘왕따’신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자기 어머니와도 같은 엘리자베타 여왕이 죽었을 때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술 마시고 고성방가하고 침대에 여자들을 불러들여 질펀하게 놀았던 사람이다. 그의 품위 없고 비상식적인 행동은 사람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다.
1761년 표트르 3세가 황제에 즉위한 직후, 러시아는 프로이센(18세기 독일지역의 한 나라)과 전쟁을 치르게 됐다.

어린 시절을 프로이센에서 자란 표트르 3세는 프로이센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곳을 마치 이상향처럼 여기곤 했는데 그는 러시아의 황제라는 지위를 망각하고 이제는 적국이 된 프로이센에 절대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협상에 서명하고 말았다.

이즈음 에카테리나는 그녀의 추종자들과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멍청한 남편이 한심한 짓을 했소. 러시아에 절대 불리한 협상을 한 것도 분통터질 일인데 프로이센 출신들을 궁으로 끌어들이고 있소. 여러분들이 뭔가 움직여야 될 것 같은데….”

그로부터 얼마 후인 1762년 7월, 러시아 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표트르 3세를 내쫓았다. 쿠데타의 주역은 에카테리나의 연인인 그레고리 오르로프 중위였으며, 대담하게도 몇 달 전 에는 둘 사이의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다.
쿠데타군에 의해 에카테리나는 여왕으로 옹립되기에 이른다. 반란군에 의해 쫓겨난 황제의 아내가 황제가 된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표트르3세는 일주일후 독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당하고 만다.

계몽군주, 화려한 외출
에카테리나는 순식간에 정국을 장악했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임을 선언했고 번개 같은 후속조치로 인해 반대파의 목소리 따위는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러시아가 에카테리나의 천하가 된 것이다.
그녀의 치적은 눈부셨다. 우선 서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에 심취해 있던 그녀는 스스로를 ‘계몽군주’라 칭하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통치를 추구했다. 이는 민중을 억압하고 가혹한 형벌로 다스리는 이른바 ‘공포전제정치’를 타파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밖에 천연두 접종, 각종 의료시설 및 고아원 설립, 법전 개정, 국경 지역 이주민 정착, 지방행정제도 정비, 무료 공립교육 제도 도입, 예술의 적극적인 후원 등 전 방위적으로 러시아의 근대화를 이끌어 냈다. 특히 예술 분야에 대한 투자와 지원은 대단한 것이어서 오늘날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에르미타쥐’ 박물관이 에카테리나 치세에 완성됐다.

남쪽의 강국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와의 전쟁에 이겨 크림반도를 차지하는가 하면 거의 열 차례의 전쟁을 통해 폴란드 땅의 상당부분을 병합했다. 당시까지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영토로 확장시켰던 황제가 에카테리나다.
에카테리나의 이상은 고상했다. 그녀는 진정으로 위대한 여왕이 되기를 원했고, 모든 면에서, 정말 어떤 분야에서도 하나 빠짐없이 완벽한 치적을 남기기 원했다.

그러나 그 지나친 의욕과 너무 비현실적인 이상추구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권이 군부의 쿠데타에 의한 것이었던 것도 결국은 걸림돌이 됐다.

다시 전제군주로
에카테리나는 연륜이 쌓여가고 성취가 커갈 수록 조금씩 변해갔다. 즉위 초기의 의욕적 개혁과 백성을 위한 합리적 정책도 이에 따라 변질돼 갔다. 그것은 영원한 충성 확보를 위해 그녀의 친위부대인 ‘쿠데타’ 군부와 귀족들을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말기의 에카테리나는 농민들에게 기혹한 세금을 물리며 착취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절대 다수인 농민들의 피를 짜서 소수 귀족의 화려한 생활을 보장했던 것이다.
그녀 자신도 점점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었다. 옷, 보석, 장신구, 고서적, 미술품, 도자지 등 값을 불문하고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학정과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봉기는 에카테리나 치세의 말년에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에카테리나는 사상 최대의 영토를 개척하고 러시아 예술을 서유럽 예술에 못지않은 수준으로 격상시켰으며, 변방 국가에서 중심국가로 탈바꿈 시켜 놓았지만 한편으로는 러시아를 사상 최대의 빚더미에 빠지게 했던 여왕이다.
화려한 문화를 꽃 피우고 강한 러시아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를 뒷받침하기 위해 울부짖고 신음하던 백성들이 있었던 것이다.

에카테리나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끊임없이 위협해 들어오던 1796년 67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에카테리나는 고귀한 이상을 추구하는 ‘계몽군주’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어느 폭군 못지않은 ‘절대군주’로 치세를 마감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러시아에서 최초의 사회주의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닌지도 모른다. 에카테리나 대제는 근대 러시아의 ‘빛이자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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