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듐’ 발견한 세계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소녀의 눈물
10살의 어린 마리아는 이럴 때는 자신이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싫어졌다. ‘그 얘기는 내 입으로 죽어도 하기 싫단 말이야, 우리는 폴란드 사람이지 러시아 사람이 아니야.’

1870년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유럽의 폴란드는 제정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는 폴란드인들에게 러시아 역사와 러시아 말을 배우도록 강요했고, 폴란드의 각 학교는 러시아 장학사들에 의해 이를 감시당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와 비슷했던 모습이다.
이날은 러시아 장학사가 오는 날. 폴란드어를 배우고 있던 아이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폴란드 책을 책상 밑으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러시아인 장학사와 수행원들이 교실로 들어섰다.
“선생, 수고가 많소. 어디 똑똑한 아이 하나만 일으켜 세워 보시오.”
선생님은 가장 영특한 마리아를 지명했다. “마리아, 네가 한 번 일어나 볼까?”

장학사는 마리아를 쳐다보더니 러시아어로 이것저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러시아 역사며 러시아어의 까다로운 문법을 막힘없이 대답하는 소녀가 대견하다는 듯 장학사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지금 폴란드 백성들을 위해 자애롭고 현명한 통치를 펴고 계신 위대한 황제의 존함은 어떻게 되느냐?”
소녀는 울컥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위대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폐하십니다.”
장학사 일행은 대단히 만족한다는 박수를 보내고 교장과 함께 교실 밖으로 나갔다. 마리아는 장학사가 나가자 와앙~ 하는 울음과 함께 눈물을 쏟으며 선생님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우리는 폴란드 사람이예요. 우리의 주인은 러시아가 아니란 말이예요.”
마리아도, 선생님도, 그리고 반 아이들도 이날 약한 조국을 한탄하며 모두가 눈물을 삼켜야 했다.(우리나라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던 일화다)

더 넓은 세상으로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 동유럽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수학과 물리학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고, 당시 보통 여자아이들이 바느질과 뜨개질, 요리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학, 과학, 인문학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던 소녀였다. ‘마리 퀴리’는 그녀가 프랑스 과학자인 피에르 퀴리와 결혼한 후의 이름이고 본명은 ‘마리아 스쿼도프스카’였다.

10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그 유명한 ‘교실 일화’가 있었던 즈음에 마리아는 어머니를 여읜다. 똑똑했던 마리아는 주변의 유복한 가정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또는 과외교사로 돈을 벌며 오히려 언니의 학비를 댔던 아주 억척스러운 소녀였다.
바르샤바 고등학교에서도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던 마리아는 아버지와 진로를 고민했다.

“마리아, 아버지는 이제 기숙사 사감으로 일할 수 있으니 생활에도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네 재능을 땅에 묻을 수는 없는 일이니 이제 집안 걱정은 버리고 둘째 언니가 있는 프랑스로 가서 공부하도록 해라.”
마리아는 둘째언니와 형부가 의사로 일하고 있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이학계 물리학부였다.(1891년)

‘퀴리부인’ 되다
마리아는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을 마치면 폴란드에 돌아가 학문을 계속하리라던 마리아는 1894년 고국을 방문했다가 자신의 꿈과 현실이 너무 나르다는 것에 낙담했다. 폴란드는 선진 과학을 연구한 토대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피에르 퀴리’라는 가난한 화학자와 우연히 만났고, 곧 사랑에 빠지게 된다. 1895년 퀴리와 마리아는 결혼에 골인한다.
“당신에게 반지도 목걸이도 걸어 줄 형편이 못 되오. 신혼여행도 갈 형편이 안 됩니다.”

“피에르, 우리는 희망을 보고 살아요. 아직 젊고 남은 날은 많아요. 그런 부수적인 기쁨은 미래를 위해 남겨놓아요.”
부부는 신혼여행 대신 자전거를 타고 프랑스 전역의 명승지를 돌아다니며 신혼여행을 대신했다. 훗날 세계 과학사의 일대 혁명이 되는 ‘퀴리 부부’의 탄생이었으며, 세계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마리 퀴리’의 탄생이었다.

부부는 과학과 학문의 동지이기도 했다. 이즈음 세계 과학계는 렌트겐의 ‘X-선’ 발견과 베크렐의 ‘우라늄의 신비한 성질’에 대한 발견 등으로 일대 센세이션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X-레이’의 길이 열린 것이다. 퀴리부부는 여기에 자극받아 방사능 물질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연일 수도승처럼 과학실에 틀어박혀 연구에 연구가 거듭됐다. 비가 새는 시험실에서 끼니를 잊고 연구에 몰두하며 밤을 새는 것도 일상이 됐고, 일손도 달려 기진맥진하기 일쑤였지만 가끔 난로에 올려놓은 차를 마시면서 달콤한 휴식을 갖는 것만으로도 부부는 만족했다. 두 딸 ‘에브’와 ‘이렌’은 지친 퀴리부부의 휴식의 원천이었다.

마리는 살림솜씨는 ‘전혀 아니올시다’ 였을 만치 집안에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도 아이들은 맑고 명랑하게 자라 어머니의 기쁨이 됐다.(장녀 이렌은 1935년 인공방사능 발견의 공적으로 노벨화학상을 받아 어머니 마리의 명성을 뒤이었다.)

마침내 1900년, 퀴리부부는 연구논문 발표를 통해 방사성물질의 성질을 밝혀내는데 성공했다. “방사성이란 화학작용이 아니며 방사능 물질에 내재한 고유의 성질로 (모든 물질의 기본인)원소 스스로가 방출하는 힘”이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발견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발견은 20세기 과학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노벨상 수상, 그리고 시련
이미 1898년 ‘폴로늄’(마리는 조국 폴란드의 이름 따 새로 발견된 물질의 이름을 폴로늄이라 했다)이라는 신물질의 발견으로 유명해진 부부는 이 논문발표로 세계적인 과학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903년, 퀴리부부는 연구의 계기를 마련했던 ‘베크렐’과 함께 노벨상을 수상한다. 첫 부부수상자이자,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가 된 것이다.

전도양양한 미래만 있을 것 같던 마리에게 불행이 닥쳤다. 1903년 말 타고 가던 남편 피에르가 낙마했고, 짐마차의 바퀴가 피에르의 머리를 깔고 지나가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변을 당했던 것이다.
마리는 남편이 일하던 소르본 대학의 교수자리를 이어받았다. 이 역시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교수라는 기록으로 남게 된다. 마리는 첫 강의에 앞서 피에르의 무덤에 다녀왔다고 한다.

마리는 남편 없이도 억척같이 연구를 계속했다. 1911년은 시련과 영광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해 그녀는 동료 과학자인 유부남 ‘폴 랑쥬랭’과의 스캔들로 곤경에 빠진다. 여성, 폴란드출신, 유태인이라는 핸디캡(?)은 그녀에 대한 매스컴과 사회적 공격을 증폭시켰다.(후일 마리퀴리의 기록으로 인해 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남달랐단 것이 밝혀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해 그녀는 보란 듯이 두 번째 노벨상을 수상한다. 1907년 라듐의 성격규정과 1910년 새로운 원소인 라듐의 추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위대한 마리
마리 퀴리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이 나자 전쟁터를 누비며 환자들을 돌보며 ‘행동하고 참여하는 과학인 상’을 보여주었다.
X-선을 활용해서 살 속에 박힌 총알을 찾아 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다. 이 과정에서 마리는 방사선을 의학적으로 활용하는 법과 그 기술을 몸에 익히며 더욱 전문적인 이론을 체득하게 된다.

마리는 1934년 7월 4일 백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연구할 당시에는 방사능 물질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해 퀴리부부는 방사는 물질을 지니고 다니기도 했고 침대 머리맡에 두기도 했다. 마리 퀴리의 백혈병은 잦은 방사능 물질 노출에 기인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리퀴리의 업적은 현대 인류의 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방사능 물질과 그 성질을 “미지의 것으로부터 그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나게 보여준 것”이라는 ‘로잔닌느 플라움’의 말로 대신할 수 있겠다. 현대적 마취약을 발명한 치과의사 ‘윌리암 모턴’이 일상생활 속의 우리에게는 칭기스칸 보다 영웅인 것처럼 - 마취약 없이 이를 뽑는다고 생각해 보라 - 의학과 에너지 등 현대인류의 생활 속에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친 마리퀴리 여사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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